춘추관의 관원으로 3품 이하 관원이 겸임하였다. 고려에서는 국초부터 역사를 수찬하기 위한 관부로 사관(史館)을 설치하였다. 그 사관에는 감수국사(監修國史) · 수국사(修國史) · 동수국사(同修國史)가 있고 다음으로 수찬관(修撰官)이 있으며, 그 아래 직사관(直史館)이 있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사관을 문한서와 합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으로 개편하였다.
1325년(충숙왕 12)에는 예문관과 춘추관을 분리하고 그 소속 관원의 직위와 품계를 개정하였다. 이때 수찬관을 충수찬관(充脩撰官) · 충편수관 · 겸편수관(兼編修官)으로 분화시켜 개칭하였다. 사관의 수관찬을 한림원 3품 이하가 겸하였는데 그 후신인 충수찬관, 충편수관, 겸편수관도 3품 이하 관원으로 겸임하게 하였다.
충편수관을 역임한 인물을 보면 충목왕 대에 정사도(鄭思道), 공민왕 대에 성석린(成石璘), 우왕 대에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顏) 등이 있었다. 이들은 좌부대언, 전의령, 삼사좌윤, 병부낭중으로 충춘추관편수관(充春秋館編修官)을 겸임하였다.
충편수관은 충수찬관, 겸편수관과 같이 국사를 직접 수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전신인 사관의 수찬관이 감수국사의 총괄 아래 국사를 수찬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그 직임을 계승한 충수찬관 등도 국사를 직접 편찬하였다. 각 관청에서 춘추관에 보낸 기록을 일력(日曆)으로 만들고 사고(史稿)를 작성하며 실록을 편찬할 때 주역을 맡았다. 이들은 문신으로 대부분 과거 급제자이었다. 충수찬관, 충편수관, 겸편수관의 직명은 임명되는 관리의 품계에 따른 구분이며 임무에는 차이가 없었다.
고려 말기인 1375년(우왕 1)에 예문관과 춘추관을 다시 합쳐서 예문춘추관이라 칭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러 1401년(태조 1)에 춘추관이 예문관과 분리되어 독립하고 수찬관(정3품), 편수관(정3품~종4품) 등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