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학사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중추원(中樞院) 및 청연각(淸讌閣) · 보문각(寶文閣) · 수문전(修文殿) · 집현전(集賢殿) 소속의 관원.
제도/관직
설치 시기
991년(성종 10)
폐지 시기
고려 후기
소속
중추원|청연각|보문각|수문전|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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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직학사는 고려시대, 중추원(中樞院) 및 청연각(淸讌閣) · 보문각(寶文閣) · 수문전(修文殿) · 집현전(集賢殿) 소속의 관원이다. 직학사의 종류는 중추원에 설치된 직학사와 청연각 · 보문각 · 수문전 · 집현전 등 전각에 배치된 직학사로 나뉜다. 중추직학사는 정3품의 중추원 관원으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숙위의 업무를 맡았다. 청연각 · 보문각 등 전각의 직학사는 국왕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정의
고려시대, 중추원(中樞院) 및 청연각(淸讌閣) · 보문각(寶文閣) · 수문전(修文殿) · 집현전(集賢殿) 소속의 관원.
설치와 운영

고려시대에 직학자의 직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중추원(中樞院)에 설치된 직학사이고, 다른 하나는 청연각(淸讌閣),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 집현전(集賢殿)과 같은 전각에 배치된 직학사이다. 전자의 중추직학사는 정3품의 중추원 관원이었다.

중추원은 991년(성종 10) 10월에 처음 설치되었다. 그 소속 관원으로는 중추원사, 중추원부사, 중추직학사, 좌승선, 우승선 등이 있었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1009년 2월에 중추원은 폐지되었다가 1011년(현종 2)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중추원 직학사도 이때 다시 설치되었다. 문종 대에 정비한 관제에 따르면 직학사는 정원이 1인이고 품질은 정3품이었다.

1095년(헌종 1)에 중추원을 추밀원(樞密院)이라 개칭하였다. 직학사는 ‘추밀(樞密) 7직’이라 일컫는 중추원 · 추밀원의 상층조직을 구성하는 관직의 하나였다. 이 가운데 판원사(判院事), 원사(院事), 지원사(知院事), 동지원사(同知院事)는 모두 종2품으로 추밀재상이었다. 그 아래 부사(副使), 첨서원사(簽書院事)와 함께 직학사는 정3품으로 재상에 들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무신집권기 추밀원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부사 이하의 관직도 재상이라고 불렀다. 추밀이면 모두 재상이 되었다.

중추직학사의 임명은 성종 대부터 덕종 초까지의 시기에 나타난다. 직학사를 역임한 인물로는 995년(성종 14)에 유방헌(柳邦憲), 1008년(목종 11)에 채충순(蔡忠順), 1011년(현종 2)에 주저(周佇), 1016년(현종 7)에 김맹(金猛), 1024년(현종 15)에 최충(崔冲), 1031년(덕종 즉위년)에 박유인(朴有仁), 1034년(덕종 3)에 진현석(秦玄錫)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과거에 급제하고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추밀원으로 개칭한 뒤 1116년(예종 11)에 한교여(韓曒如)가 추밀원지주사 겸 직학사(樞密院知奏事兼直學士)로 활동하였다. 후자의 전각에 설치한 직학사를 보면 1116년(예종 11)에 궁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을 짓고 학사, 직학사, 직각을 각 1인씩 선발하였다. 얼마 뒤 따로 보문각(寶文閣)을 두고 청연각 학사, 직학사를 보문각 학사, 직학사로 바꾸었다. 보문각 직학사에 임명된 인물로는 정극공(鄭克恭), 윤언이(尹彦頤) 등이 있었다.

임무와 직능

고려 전기 중추원은 국왕의 숙위(宿衛) 기능을 하였다. 여기서 숙위는 숙직(宿直) 또는 직숙과 통하는 말이므로 중추원의 관원이 궁궐 안에서 시위하는 일을 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의례 및 궁중 서무를 주관하는 직능을 수행하였다. 중추직학사는 과거 급제자로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숙위의 업무를 맡았다. 또한 청연각 · 보문각의 직학사는 경서를 강론하였다. 여러 관과 전의 학사직은 문신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국왕의 시종에 대비하였다. 직학사는 국왕의 시종하며 경연을 주로 하였다.

변천 사항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를 개편하면서 추밀원도 밀직사(密直司)로 바뀌었다. 이때 그 소속 관원의 명칭도 고쳐졌다. 이로써 추밀원 직학사가 밀직학사(密直學士)로 개칭되었다. 1298년에 충선왕이 즉위하여 밀직사를 폐지하고 광정원(光政院)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직학사의 직은 혁파되었다. 같은 해에 충선왕이 퇴위하고 밀직사가 부활되었지만, 직학사는 다시 설치되지 않았다.

1356년(공민왕 5)에 문종 관제를 복구하면서 밀직사를 다시 추밀원으로 고치고 소속 관원의 정원과 품질을 회복시켰다. 그런데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밀직사로 개칭하면서 정3품의 제학(提學)으로 고치고 이후 제학을 학사, 또다시 학사를 제학으로 고쳤다. 직학사의 직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한편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홍문관(弘文館)에 학사와 직학사를 두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우문관(右文館)과 진현관(進賢館)문한서에 합병하였다가 얼마 뒤 다시 두 관을 설치하면서 정4품의 직제학을 두었다.

1356년(공민왕 5)에 관제 복구에 따라 두 관을 수문전(修文殿), 집현전(集賢殿)이라 하고 여기에 직학사를 두었다. 그 뒤 다시 1362년(공민왕 11)에 수문전과 집현전을 각각 우문관, 진현관이라 고치고 직학사를 직제학이라 개칭하였다. 1369년(공민왕 18)과 1372년(공민왕 21)에 두 전의 명칭을 번갈아 바꾸고 직학사의 명칭도 직제학에서 직학사, 또다시 직학사에서 직제학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유방헌 묘지명(柳邦憲墓誌銘)」

단행본

박용운, 『"고려사" 백관지 역주』(신서원, 2009)
박용운, 『고려시대 중추원 연구』(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01)

논문

신수정, 「고려전기 학사관부와 예종대의 학사직 운영」(『역사와현실』 86, 한국역사연구회, 2012)
이정훈, 「고려전기 학사직과 국정운영」(『한국중세사연구』 26, 한국중세사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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