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언이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에, 광주목사, 정당문학, 판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금강거사(金剛居士)
시호
문강(文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090년(선종 7)
사망 연도
1149년(의종 3)
본관
파평(坡平)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기거랑(起居?)|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광주목사(廣州牧使)|정당문학(政堂文學)|판형부사(判刑部事)
관련 사건
묘청의 난
정의
고려 전기에, 광주목사, 정당문학, 판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이다. 문하시중 윤관(尹瓘)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114년(예종 9) 3월 과거에 급제하고 후 금오위녹사, 첨사부사직(詹事府司織), 예부낭중, 기거사인(起居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128년 8월 예부시랑으로 송에 가서 송의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못함을 알리는 표문(表文)을 바치고 12월 돌아왔다. 이듬해 5월 기거랑(起居郎)으로서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 · 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정치의 득실을 논해 왕으로 하여금 실시하도록 하였다.

1132년 4월 기린각(麒麟閣)에서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정항(鄭沆) · 정지상 등과 경연(經筵)에 나아가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상으로 화서대(華犀帶)를 받았다.

1133년 5월 왕이 김부식(金富軾)에게 『주역(周易)』을 강론하고, 김부식에게 이를 묻고 논란하게 하였다. 『주역』에 매우 정통했던 윤언이는 정연한 논리로 반박해 김부식의 대답을 궁하게 하였다. 김부식과는 이전부터 감정이 있었다. 예종 때 아버지 윤관이 왕명으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을 지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문도(門徒)들이 보기에 글이 좋지 않았는지, 왕에게 말해 김부식을 시켜 다시 짓게 하였다. 김부식은 사양하지 않고 다시 지었고, 그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1135년 서경에서 묘청(妙淸)의 반란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김부식의 막료로 출정해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지상과 내통했다는 김부식의 보고로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이 때 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과 지난날의 자신을 해명하는 글을 올렸다.

이후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 同知樞密院事), 수사공 좌복야 판예부사(守司空左僕射判禮部事), 참지정사 판서경유수사(參知政事判西京留守事) 등을 역임한 후 1148년(의종 2) 12월 정당문학(政堂文學) · 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9월 세상을 떠났다.

예종 · 인종 양조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주역』에 밝았다. 말년에 불교를 매우 좋아했고, 은퇴해서는 파평(坡平)에서 살았으며, 중 관승(貫乘)과 친교가 있었다.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해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려 매년 녹(祿)을 주었다. 저서로는 『역해(易解)』가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금남집(錦南集)』
「윤언이 묘지명(尹彦頤墓誌銘)」
관련 미디어 (1)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