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림(子臨). 호장의 자손으로 중앙에 진출해 섭대부경(攝大府卿)이 된 정목(鄭穆)의 넷째 아들이며, 정서(鄭敍)의 아버지이고, 숙종 때 공신인 왕국모(王國髦)의 사위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에 임명되었다. 나이가 적으나 잘 판단해 정극영(鄭克永)·한충(韓沖)과 더불어 사록으로는 이정 일한(二鄭一韓)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가 예종 때 내시(內侍)에 속하였다.
1116년(예종 11) 집주(執奏)를 맡아 공평 정직하며 출납(出納)에 상세하고 밝았다. 이자량(李資諒)을 수행해 송나라에 갔을 때,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가 표장(表章)을 보고 칭송하였다.
이듬해 귀국해 우정언에 올랐으나 뜻을 굽히지 않아 전주통판(全州通判)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우사간을 거쳐 양광(楊廣)·충청도의 안찰사를 역임하였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이 집권했으나 아부하지 않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몰락한 이듬해 『서경(書經)』의 「열명(說命)」·「주관편(周官篇)」을 강의하고, 1129년 서적소(書籍所)에서 송조(宋朝)의 『충의집(忠義集)』을 강독하였다. 1132년 기린각(騏麟閣)에서 『예기(禮記)』 「중용편(中庸篇)」을 강의하였다.
이어 왕이 묘청(妙淸)의 건의로 서경에 행차했을 때, 묘청·정지상(鄭知常)이 왕을 오래 머물게 할 의도로 간관들을 풍유해 개경의 궁궐수리를 중지하기를 청하자, 2회의 소(疏)를 올려 궁궐수리와 환어(還御)를 요청해 받아들여졌다.
이 해에 지공거(知貢擧) 최자성(崔滋盛)이 시제(試題)를 잘못 내어 유사(有司)가 파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 거자(擧子)인 김이영(金貽永)이 사위이며, 왕비의 모제(母弟)가 되므로 공예태후(恭睿太后)·한유충(韓惟忠)과 더불어 간청해 파하지 않게 하였다.
1135년 우승선(右承宣)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허홍재(許洪材) 등을 합격시켰다. 이 해에 수락당(壽樂堂)에서 한림학사로서 『시경』의 7월편(七月篇)을, 이듬해에는 천성전(天成殿)에서 『당감(唐鑑)』을 강독하였다. 1136년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로 승진되었으나 이튿날 죽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