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4년(명종 4) 동부녹사(東部錄事)로 있었는데, 성격이 시샘이 많고 험악하며 용맹하고 사나웠다. 1196년, 당시 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인 장군 이지영(李至榮)과 비둘기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최충수는 이를 빌미로 형 최충헌에게 “이의민과 그 아들들은 진실로 나라의 도적이라 내가 죽이려고 한다.”며 형이 함께 해줄 것을 부탁하고 좋은 가문 출신의 무반들을 설득하여 한미한 출신의 집단이었던 이의민정권을 타도하려고 하였다. 이에 최충수는 최충헌과 조카인 대정(隊正) 박진재(朴晉材), 친척인 노석숭(盧碩崇)과 함께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이의민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상장군 길인(吉仁), 장군 유광(兪光), 박공습(朴公襲) 등 이의민정권의 잔존세력은 최충헌 · 최충수 형제를 암살하려 시도하였다. 최충헌과 최충수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이들 일당의 여당으로 지목되는 문 · 무관(文武官)을 대량 학살한 뒤 권력을 잡았다. 이후 최충수는 최충헌과 함께 그동안 누적된 폐정(弊政)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정치 구도를 재편성하려 하였다.
이듬해 이의민을 죽여서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한 공으로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었다. 이 해 9월에 최충헌과 함께 명종이 「봉사십조」 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한다는 이유로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왕의 아우 평량공 왕민(平凉公 王旼)을 새로운 국왕인 신종(神宗)으로 옹립하였다. 그 공으로 수성제란공신 삼한정광 중대부 응양군대장군 위위경 지도성사 주국(輸誠濟亂功臣 三韓正匡 中大夫 鷹揚軍大將軍 衛尉卿 知都省事 柱國)이 되었다.
또, 왕의 폐립(廢立)에 앞서 최충헌과 함께 이의민 제거에 협조하였던 중서령(中書令) 두경승(杜景升)을 비롯하여 추밀원부사 유득의(柳得義), 상장군 고안우(高安祐), 대장군 백부공(白富公), 친종장군(親從將軍) 주원적(周元迪) 등 13명과 연담(淵湛) 등 10여명의 승려를 유배 보냈다.
정변 성공 이후 정치적인 주도권을 최충헌이 장악한 데 불만을 품은 최충수는 문객들과 함께 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아 권력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최충수의 세력이 강대해지는 것을 염려한 최충헌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결국 최충수는 군사를 이끌고 최충헌과 싸웠으나 흥국사(興國寺)에서 패배하였다. 이에 임진강 남쪽에서 다시 거사하기 위하여 장단을 건너서 파평현(坡平縣: 지금의 경기도 파주) 금강사(金剛寺)에 이르렀으나 추격자에게 살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