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6년 최충헌(崔忠獻)과 최충헌의 아우 최충수(崔忠粹)가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무신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최충헌 형제는 곧장 개경으로 달려와 이의민 잔당으로 지목된 문·무관(文武官)을 학살하거나 유배 보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의민세력이었던 장군 유광은 상장군(上將軍) 길인(吉仁)의 휘하에서 장군 박공습(朴公襲) 등과 함께 최충헌 형제를 척살하기로 모의하고 실행에 나섰다.
유광은 수창궁(壽昌宮)의 무기 창고에서 병장기를 꺼내 금군(禁軍)·환관(宦官)·노예 등 약 1천여 명에 나누어주고 무장시킨 후 궁문을 나서서 최충헌 휘하 군대와 싸웠다. 그러나 6위(六衛)의 정예병을 거느린 최충헌 등에게 크게 패배하여 무리가 산산이 흩어졌다. 이에 유광은 길인·박공습 등과 다시 수창궁으로 들어가서 궁문을 닫고 농성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충헌 등이 군대를 인솔하고 궁궐을 포위한 다음 궁문으로 밀려들어오자 항거할 수 없음을 알고 장군 박공습과 함께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