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의 외친(外親). 부인은 대부소경(大府少卿)을 역임한 김포정씨(金浦鄭氏) 정원직(鄭元直)의 딸이다. 최충헌의 총애를 받아 현달하였다.
본래 시정잡배에서 출세하였는데, 최충헌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최충헌이 총애하였다. 신종~고종 연간에 내시(內侍)·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이부낭중(吏部郞中)·판사재사(判司宰事) 등을 역임하였다.
1202년(신종 4)부터 최충헌의 사저에서 최충헌과 함께 문·무관의 임면을 결정하는 등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노관의 집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기세가 날로 성하였으며, 친척들도 모두 현달해 뇌물을 공공연하게 받았다. 후에 외직(外職)인 안서도호부사(安西都護府使)로 나가게 되자, 금극의(琴克儀: 琴儀)가 대신하게 되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 崔怡)가 집권하면서 정치권력에서 제거되었다. 곧 1220년(고종 7) 전주(全州)에 양이(量移: 섬이나 변방에 유배했던 죄인을 內地나 가까운 곳으로 옮김)되었다.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여 수선사(修禪社)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1250년(고종 37)에 건립된 「월남사지진각국사비(月南寺址眞覺國師碑)」의 음기(陰記)에 진각국사 혜심(慧諶)이 이끌었던 수선사에 입사(入社)한 인물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부인 정씨 또한 불교에 심취하여 흥국사(興國寺)·보제사(普濟寺) 등에 시주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