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성(安城). 아버지는 신호위중랑장 어사잡단(神虎衛中郞將 御史雜端) 김신영(金臣穎)이고, 외조는 금오위섭대장군(金吾衛攝大將軍) 이언공(李彦公)이다.
1204년(희종 즉위년)에 자인(慈仁)·장산(章山) 두 현(縣)의 수령이 되었는데 잘 다스렸으므로 채방사(採訪使)가 세 차례나 포상하기를 추천하였다. 1211년(희종 7)에 선경전직(宣慶殿直)이 되고, 영은관직 겸 5군녹사(迎恩館直 兼五軍錄事)로 옮겼다. 이후 대영승(大盈丞), 문하녹사(門下錄事), 권지지후(權知祗侯) 등을 역임하였다. 1221년(고종 8)에는 달단접반사(韃靼接伴使: 蒙古接伴使)가 되어 몽고 사신 접대 임무를 잘 처리하였다. 이어 감찰어사(監察御史),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제고사(祭告使), 양양(襄陽) 수령, 형부낭중(刑部郎中) 등을 거쳤다. 잠시 영주부사(靈州副使)로 좌천되었으나 1년 뒤 복직되었다.
1231년(고종 18)에는 달단(韃靼: 蒙古)사람들이 오자 영송부사(迎送副使)가 되어 40일 동안이나 호인(胡人)들을 접대하였다. 이듬해에는 강화(江華)로 들어가는 임금의 행차를 배행하였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을 거쳐 조청대부 판장작감사 지삼사사(朝淸大夫 判將作監事 知三司事)가 되었다. 1237년(고종 24)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강화도 북산(北山)에 장례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