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용장(用章). 아버지는 검교첨사(檢校詹事) 양공소(梁公紹)이다.
아버지의 외고조(外高祖) 삼한공신증태위(三韓功臣贈太尉) 최영휴(崔英休)의 문음(門蔭)으로 1108년 (예종 3) 양온서사동정(良醞署史同正)이 되었고 그 뒤 여러 서리직(胥吏職)을 거쳐 1120년(예종 15) 광주감무(光州監務)로 나아갔다.
인종(仁宗) 때에는 참직권지감찰어사(參職權知監察御史)·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상주목부사·형부낭중(刑部郎中)·시어사 중승(試御史中丞)·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146년(의종 즉위년)에는 사신으로 금나라에 가서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다.
의종(毅宗) 때에는 시상서우승(試尙書右丞)·차호부상서 지서경유수사(借戶部尙書知西京留守事)·상서좌승 추밀원좌승선 지삼사사(尙書左丞樞密院左承宣知三司事)·추밀원부사 어사대부(樞密院副使御史大夫)·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은청광록대부 이부상서 판형부사(銀靑光祿大夫吏部尙書判刑部事)·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金紫光祿大夫中書侍郎同中書門下侍郎平章事) 등을 지냈다.
1157년에 치사(致仕)하였으며 이듬해 수사도(守司徒)가 가해졌다. 성격이 청렴하고 순직하여 시종 한결같았으며, 일찍이 간관(諫官)이 되어서 정함(鄭諴)을 탄핵할 때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