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전기, 감찰어사·좌간의대부·서북면병마사·직문하성사·검교태자태부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예종(睿宗) 때는 1109년(예종 4) 식목녹사(式目錄事)에 발탁되었고, 1113년(예종 8)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어 송나라에 들어갔다가 휘종(徽宗)이 내려준 대성신악(大晟新樂)을 받아서 이듬해에 돌아왔다. 또한 1115년(예종 10) 권지지후(權知祗候)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와 통판서경유수사(通判西京留守事)가 되었다. 그 뒤,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올랐다가 이부낭중(吏部郎中)·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옮겼으며, 예종 말년에는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파견되었다.
인종(仁宗) 때에는 1126년(인종 4)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발생하자 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잘 지킨 공으로 형부시랑(刑部侍郎)·지제고(知制誥)에 제수되었다가 국자좨주(國子祭酒)·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였고, 이듬해부터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오르고 공부상서(工部尙書)·삼사사(三司使)까지 맡았다. 1130년(인종 8)에는 간의(諫議)로서 당면한 정치 현안에 대한 소(疏)를 올렸다. 다음 해에는 직문하성(直門下省)이 되어 우간의(右諫讓) 이신(李伸), 중서사인(中書舍人) 임존(林存), 좌사간(左司諫) 최함(崔諴) 등과 함께 무인(武人)인 최봉심(崔逢深)이 동경지례사(東京持禮使)의 서장관(書狀官)을 맡을 수 없다고 간언하였다. 특히 묘청(妙淸)을 추종하면서 ‘나라에서 내게 장사 1천 명만 준다면 곧바로 금(金)에 들어가서 그 임금을 사로잡아 바치겠다.’고 주장했던 최봉심을 사신으로 보내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때 궁궐 문 앞에서 엎드려 사흘 동안 간언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그 뒤에 1134년(인종 12) 검교태자태부(檢校太子太傅)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듬해에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경상도선생안(慶尙道先生案)』
- 「안직숭 묘지명(安織崇墓誌銘)」
단행본
- 김용선 편,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논문
- 송혜진, 「조선초기 『대성악보』의 수용과 변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6)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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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97~98쪽)에서는 안신조(安申祚)의 ‘申’을 ‘忠’으로 판독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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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이문저묘지명」에 따르면, 이문저는 조부의 음서[祖父蔭]로 관직에 나가서 1138년(인종 16)에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을 지내고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을 거쳐 명종대에 상서좌승(尙書左丞),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등을 지내고 1180년(명종 10)에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는, 안직서의 딸이 아닌, 상서우승(尙書右丞) 김신련(金臣璉: 1083~1161)의 딸과 결혼하여 6남 4녀를 두었다고 한다. 다만, 안직서의 부인과 김신련의 부인은 모두 유자유(柳子維)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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