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예부시(禮部試)라는 과거(科擧)를 관장한 정부(正副) 시관(試官)을 지공거(知貢擧), 동지공거(同知貢擧)라고 하였다. 기본적으로 예부시라 불린 과거 본고시의 문제 출제, 채점 등 시험 전반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시관은 대체로 지공거와 동지공거의 두 사람으로 구성하였다. 958년(광종 9) 과거제를 처음 실시하면서 쌍기(雙冀)를 지공거로 삼은 이래 문신 1인이 임명되었다. 972년(광종 23)에 잠시 동지공거를 두었다가 곧 혁파하였다. 996년(성종 15)에 지공거를 도고시관(都考試官)이라 하였다가 다음해에 다시 지공거로 고쳤다. 1083년(문종 37)에 동지공거 1인이 추가로 설치되었는데, 이후 지공거, 동지공거 체제로 굳어졌다.
한편으로 977년(경종 2)의 친시(親試)에서 왕융(王融)을 독권관(讀券官)으로 삼았는데, 이는 친시에서 왕이 지공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독권관의 사례는 이때를 제외하고 보이지 않는다. 친시는 복시(覆試), 전시(殿試)라고도 하는데, 예부시로 선발한 급제자들을 국왕이 재심하는 형식이다. 이것은 지공거가 관장한 시험에 국왕이 개입하여 시관을 견제하는 동시에 급제자를 왕이 뽑는다는 모양새를 만들어 왕권을 강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좌주(座主)- 문생(門生) 관계가 중요하게 형성되면서 이러한 의미가 더욱 강조되기도 하였다. 이와 달리 1115년(예종 10)의 경우처럼 성적 평가에 대한 부정(不正)을 호소하여 전시가 시행된 사례도 있다.
복시는 국왕이 강력히 재시험한 경우와 부분적으로 참여한 두 가지가 있었다. 예부시에서 지공거에게 위임하느냐, 또는 국왕이 전시 · 복시를 실시하느냐에 따라 예부시의 기능이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복시가 자주 실시된 시기는 성종(成宗) 때부터 예종(睿宗) 때까지이고 그 이후는 폐지되었다. 복시는 시관과 결탁된 귀족의 악용을 막고, 왕권을 강화시킴으로써 권세가(權勢家)에게 타격을 주었다. 복시가 실시된 시기에는 문벌세력(門閥勢力)의 폐단이 있었다 하더라도 외척(外戚)과 관계가 있었으나, 복시가 폐지된 인종(仁宗) 이후에는 과거를 통한 문벌귀족(門閥貴族)이 급격히 성장하였다.
무신집권기(武臣執權期)에는 과거를 악용해 형성된 문벌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과거를 지속하고 복시를 부활하지 않음으로써 무신집권 말기에는 다시 과거를 통한 시관과 급제자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좌주라 하고, 좌주가 실시한 과거에서 급제한 자를 문생이라 하였다. 좌주와 문생은 혈연으로 맺어진 부자에 비교될 만큼 집단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 압제 아래에서 이들의 단결은 더욱 공고해졌고, 집단 의식을 가지는 연회(宴會)와 동년회(同年會), 그리고 오서대(烏犀帶)와 같은 신물(信物)로써 유대를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좌주 · 문생의 문벌을 자랑하던 권보(權溥)는 『계원록(桂苑錄)』을 지어서 이들의 명단을 수록하고, 집단 의식을 남기고 있다. 좌주와 문생의 집단은 보수 세력으로서 개혁 정치에 제동 역할도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은 좌주인 이제현(李齊賢)을 몰아내고, 신돈(辛旽)을 등용하면서 과거를 통해서 형성된 귀족들의 집단 의식을 뿌리 뽑으려 하였다. 공민왕은 전시를 실시하고, 시관을 늘려 좌주와 문생의 유대를 일으키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실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이후에는 이러한 개혁 방향이 환원되었고, 조선의 건국 직전에 집권한 개혁파들은 시관을 6인으로 늘리고, 전시의 시관도 2인으로 하였다.
고려 말의 과거 제도의 개혁과 더불어 증가된 시관은 조선 초에도 계승되었다. 대체로 시관을 6, 7인으로 늘리고, 대독관(對讀官) · 전시독권관(殿試讀卷官)을 2인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공민왕 때의 과거제도의 개혁은 조선 건국자들에 의해 보완 · 강화됨으로써 조선시대의 지공거는 문생과의 관계가 희박해지게 되었다. 조선의 과거는 고시관 제도에 있어서 고려시대보다 훨씬 객관적인 운영이 가능하였고, 제도상 커다란 발전을 보였다.
고려시대의 지공거는 임시직이었으나 관직에 있는 자의 가장 명예스러운 직책이었으므로 문집에 사양표(謝讓表)가 많이 남아 있다. 이런 글에서 고려의 문벌사회(門閥社會)와 결합된 과거의 측면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