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시대, 예부시(禮部試)라 불린 과거의 시관(試官).
설치 목적
임무와 직능
한편으로 977년(경종 2)의 친시(親試)에서 왕융(王融)을 독권관(讀券官)으로 삼았는데, 이는 친시에서 왕이 지공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독권관의 사례는 이때를 제외하고 보이지 않는다. 친시는 복시(覆試), 전시(殿試)라고도 하는데, 예부시로 선발한 급제자들을 국왕이 재심하는 형식이다. 이것은 지공거가 관장한 시험에 국왕이 개입하여 시관을 견제하는 동시에 급제자를 왕이 뽑는다는 모양새를 만들어 왕권을 강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좌주(座主)-문생(門生) 관계가 중요하게 형성되면서 이러한 의미가 더욱 강조되기도 하였다. 이와 달리 1115년(예종 10)의 경우처럼 성적 평가에 대한 부정(不正)을 호소하여 전시가 시행된 사례도 있다.
복시는 국왕이 강력히 재시험한 경우와 부분적으로 참여한 두 가지가 있었다. 예부시에서 지공거에게 위임하느냐, 또는 국왕이 전시 · 복시를 실시하느냐에 따라 예부시의 기능이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복시가 자주 실시된 시기는 성종(成宗) 때부터 예종(睿宗) 때까지이고 그 이후는 폐지되었다. 복시는 시관과 결탁된 귀족의 악용을 막고, 왕권을 강화시킴으로써 권세가(權勢家)에게 타격을 주었다. 복시가 실시된 시기에는 문벌세력(門閥勢力)의 폐단이 있었다 하더라도 외척(外戚)과 관계가 있었으나, 복시가 폐지된 인종(仁宗) 이후에는 과거를 통한 문벌귀족(門閥貴族)이 급격히 성장하였다.
무신집권기(武臣執權期)에는 과거를 악용해 형성된 문벌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과거를 지속하고 복시를 부활하지 않음으로써 무신집권 말기에는 다시 과거를 통한 시관과 급제자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좌주라 하고, 좌주가 실시한 과거에서 급제한 자를 문생이라 하였다. 좌주와 문생은 혈연으로 맺어진 부자에 비교될 만큼 집단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 압제 아래에서 이들의 단결은 더욱 공고해졌고, 집단 의식을 가지는 연회(宴會)와 동년회(同年會), 그리고 오서대(烏犀帶)와 같은 신물(信物)로써 유대를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좌주 · 문생의 문벌을 자랑하던 권보(權溥)는 『계원록(桂苑錄)』을 지어서 이들의 명단을 수록하고, 집단 의식을 남기고 있다. 좌주와 문생의 집단은 보수 세력으로서 개혁 정치에 제동 역할도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은 좌주인 이제현(李齊賢)을 몰아내고, 신돈(辛旽)을 등용하면서 과거를 통해서 형성된 귀족들의 집단 의식을 뿌리 뽑으려 하였다. 공민왕은 전시를 실시하고, 시관을 늘려 좌주와 문생의 유대를 일으키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실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이후에는 이러한 개혁 방향이 환원되었고, 조선의 건국 직전에 집권한 개혁파들은 시관을 6인으로 늘리고, 전시의 시관도 2인으로 하였다.
변천 사항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 허흥식, 『고려과거제도사연구』(일조각, 1981)
-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일지사, 1990)
- 박용운, 『『고려사』 선거지 역주』(경인문화사, 2012)
논문
- 박수찬, 「고려전기 복시의 시행과 기능」(『역사와 현실』 106, 한국역사연구회, 2017)
- 조좌호, 「여대의 과거제도」(『역사학보』 10, 역사학회, 1958)
- 최혜숙, 「고려시대 지공거에 대한 연구」(『최영희선생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탐구당, 1987)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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