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과거는 예부시(禮部試)로 끝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특별한 경우 복시를 실시하였다.
복시는 983년(성종 2)에 처음 실시되어 1120년(예종 15)을 마지막으로 모두 34회 실시되었다. 이를 왕대별(王代別)로 보면 성종 때 3회, 현종 때 7회, 문종 때 10회, 선종 때 3회, 숙종 때 5회, 예종 때 6회이다.
이는 과거가 실시될 때마다 시행된 것은 아니다. 982년의 복시는 왕의 절일(節日)을 경축하는 경과(慶科)에 가까운 성격이며 13년 이후의 복시가 주로 예부시의 합격자를 대상으로 한 참다운 복시이다.
복시는 원칙적으로 예부시의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여 실시하는 재시험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제도로 지켜진 것은 아니다. 1115년 5월, 예부시 합격자 성적사정이 잘못되어 예부시의 합격자와 낙제자를 포함해 재시험하였다.
또한 이듬해 4월에는 예부시의 합격자 24인, 전년도 친시(親試) 응시자 10인, 현직관리로 과거에 응시자 4인, 진사시(進士試)에 8회 이상 응시자 20인, 별환(別喚 : 특별히 국왕의 부름을 받은 자) 4인을 고시(考試)해 38인의 급제자를 내고 있다.
이는 복시가 예부시 합격자의 급제순위만 결정하는 전시(殿試)와 달리 급락(及落)을 결정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시험관에 대한 간접적인 견책의 의미와 과거에 대한 국왕의 영향력이 크게 신장된 것을 뜻한다.
복시는 국왕이 직접 주재하거나 태자에게 명해 고시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문신들에게 명해 시행하였다. 예종대에는 복시 당일에 방방(放榜 : 과거 급제자에게 증서를 주던 일)하던 지난날의 즉일방방(卽日放榜) 대신 4∼9일간의 시간적 간격을 둠으로써 즉일방방에 따르는 졸속성을 지양하였다.
시험과목은 시(詩) · 부(賦)만을 고시하는 것이 상례였고,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 특별한 경우 黃牌)를 주었다. 복시가 자주 실시된 고려시대 전기에는 시험관의 부정과 지나친 권력의 증대를 방지했고, 왕권이 강화되어 과거실시에 나쁜 영향을 미친 경우도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학을 장려하고 인재를 발굴하는 데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