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재질에 따라 분류하면 목비 · 석비 · 철비로 갈라지나, 우리 나라에는 목비로서 현전하는 것은 없고, 철비가 간혹 있을 뿐, 거의 전부 석비이다. 비는 처음 묘문(廟門)에 세워졌던 것인데, 그 뒤 무덤 가에 세워졌고, 후한(後漢)시대에 문자가 새겨지고 비신 · 비두(碑頭) · 부좌(趺座) 등 형식이 갖추어졌다.
비는 내용에 따라 탑비(塔碑) · 묘비(墓碑) · 신도비(神道碑) · 사적비(事蹟碑) · 송덕비(頌德碑) 등 여러 갈래가 있는데, 대개는 사건 당시 또는 그와 가까운 시기에 기록되기 때문에 역사학 · 문자학 · 서예 등 여러 분야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된다. 또 비의 구조와 양식 등은 미술사의 자료가 되고, 비에 새겨진 입비 연 · 월 · 일은 정확한 연대를 밝혀주므로 사적 가치가 더욱 높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비로 가장 오래된 것은 85년에 세워진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이고, 그 다음은 압록강 대안의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호태왕비(好太王碑), 신라 진흥왕의 척경(拓境) 및 순수비 등이다.
고려시대에는 고승의 탑비가 많이 세워졌고, 조선시대에는 신도비와 묘비가 많이 세워지는 등 시대에 따라 비의 양식과 내용이 변화하였다. 비에 새겨진 내용은 가장 확실한 역사서와 같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그 가운데 주요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의 네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옛날 장의(葬儀)에서 세우던 풍비(豐碑)가 그 유래라는 설이다. 풍비란 큰 나무를 석비 모양으로 깎아 시신을 묻을 광(壙) 위아래에 세우고, 그 끝에 뚫은 구멍에 밧줄을 끼워서 관에 연결하여 서서히 하관하는 장구(葬具)였다.
이 풍비가 장례 뒤까지 남게 되자 거기에 망인의 공덕을 기록한 데서 비가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는 일영비(日影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일영비란 고대의 궁실 뜰에 세운 돌기둥인데, 그 해 그림자를 보고 시각을 아는 일종의 해시계이다.
나중에 여기에다 글자를 기록함으로써 비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영비는 희생물을 매어두는 기둥으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일영비가 햇빛 곧 양기를 흡인(吸引)하므로 음양을 구별하는 영적인 힘이 있어 사후의 세계와 통한다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셋째는 봉선(封禪)의 의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봉선이란 역성입국(易姓立國)한 제왕이 천지의 제신(諸神)에게 고공(告功)하는 의식이다. 봉선은 다시 봉과 선으로 구별되는데, 봉은 높은 산에 올라가 천신에 제사하는 의식이고, 선은 작은 산에 올라가 산천신에 제사하는 의식이다.
봉선이 비의 유래가 되었다 함은 봉의 경우로서 산상에 글자를 새긴 돌을 세움으로써 산의 높이를 더하여 준다는 뜻이 있었다. 이러한 봉선의 흔적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塹城壇)은 제천의 제단으로, 제주도 삼성혈(三姓穴)은 땅에 제사한 터로 보인다.
넷째는 시신을 매장한 곳에 표시물로 세운 갈(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갈은 나무로 깎은 말뚝인데, 그 한쪽을 깎아 망인의 성명 따위를 적은 것이 나중에 돌에 새기는 갈(楬)로 발전하여 비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 제설을 종합하여 보면 비의 기원이 장의 또는 제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풍비 유래설이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어떻든 비는 신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묘비가 장의의 유제(遺制)로서 매장된 사자(死者)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묘정비(廟庭碑:묘당의 뜰에 세운 비석)는 그 묘정에 향배된 인물이나 그곳의 신성을 나타낸다. 사묘(祠廟)에 안치된 신주 또한 비와 비슷한 형식으로 제작되기도 하고, 비가 세워진 장소는 신성시되어 제단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비 자체가 신이 다니는 길이라는 인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 신도비(神道碑)는 그러한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묘혈의 입구에 세우는 묘비는 지하인 명계(冥界)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통로가 된다.
묘정비는 천상의 음계(陰界)로부터 신이 강림하여 지하로 연결되는 우주목(宇宙木)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비는 곧 신의 강림체(降臨體)이며 음양을 초월한 힘이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비의 유래를 고대 중국의 풍비로 볼 때, 시신의 하관을 위해 세운 기둥에 망인의 행적과 연대를 알리기 위한 약력 따위를 기록하면서부터 비의 신격화가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당대(唐代)에 와서 묘제가 제정되고, 5품 이상 고관의 묘에는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비를 세우게 하였고, 6품 이하 관원의 묘에는 원두비신(圓頭碑身)에 방형대좌(方形臺座)만을 사용한 갈(楬)을 세우게 함으로써 신분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당의 풍습이 그대로 들어와 능묘비(陵墓碑)나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에 걸쳐 유행된 승려들의 탑비에만 격식이 적용되었을 뿐 귀족들에 대한 규정은 없었으므로 주로 묘지석(墓誌石)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정3품 이상은 신도비를 세우고 그 이하는 묘갈(작은 묘비)을 세우게 한 것이 ≪경국대전≫에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시대에는 비갈(비와 갈)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의 종류는 비문의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즉 묘비 · 탑비 · 능묘비 · 신도비 · 사적비 · 유허비 · 기공비(紀功碑) · 송덕비 · 효자비 · 열녀비 · 사비(祠碑) 등이 그것이다. 묘비는 중국의 진한(秦漢)시대 이래 사자(死者)의 이름 · 가계 · 행적 등을 돌에 새겨 묘역에 세운 것이다.
묘비에 쓰인 석문(石文)은 비 · 갈 · 표(表) · 지(誌) 등으로 분류되고, 불승의 것은 탑비, 제왕의 것은 능비라 하며, 묘갈 · 신도비와 같이 묘소 입구에 세워지는 것이 있다. 신도비와 묘갈은 묘비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유학을 숭상하면서 입석이 조상에 대한 효의 한 표현으로 인식되어 크게 성행하였다. 석문은 그 형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즉 비는 석재를 방각형(方角形)으로 깎아서 만든 것이고, 갈은 둥그런 자연석의 한쪽 면만 깎은 것이므로, 비는 비신의 윗부분이 네모지고 갈은 석물의 위쪽이 둥그스름하다.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제도에서 3품 이상의 고관만 세울 수 있었으나, 때로는 공신 · 석유(碩儒 : 큰선비) 등의 신도비를 왕명으로 세우게 한 적도 있었다.
왕릉의 신도비는 문종 때 금지되어 왕릉 신도비로는 세종대왕의 것이 마지막이었다. 사자의 신주(神主)나 신격이 모셔진 사묘(祠廟)의 비도 사비 · 묘정비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지지(地池) · 궁실(宮室) · 교도(橋道) 등을 창설 또는 수축하고 그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사적비 · 기념비 따위로 불리는데, 사찰이나 묘사의 증 · 개축 사적을 적은 비도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고적에 세운 비는 대개 유허비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더러는 유허지에 단을 설치하여 고인을 제사하게 만든 것도 있어서 어떤 것은 사묘비에 가깝고 어떤 것은 사적비에 가까운 것도 있다. 궁실이나 관사에 세워진 비는 그곳과 관련이 있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경우가 있어 이런 것을 송덕비 또는 덕정비(德政碑)라 한다.
관아의 입구나 도로변에 세워진 이런 비는 흔히 불망비 · 선정비 · 시혜비(施惠碑) · 추모비 등의 이름을 갖는 게 보통이다. 지방 수령이나 세도가를 칭송하는 이런 종류의 비는 한때 크게 유행되어, 지탄받은 탐관까지 비가 세워진 예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때 국법으로 금지한 적도 있었으나 조선시대 말기에는 수없이 세워졌다.
이러한 비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므로 더욱 성행하였다. 기공비에는 충신 · 열사의 공덕을 기념하는 것이 있는데, 대개 그 공훈과 관련이 있는 곳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국가의 교화정책과 관련된 비로는 효자비 · 열부비(烈婦碑) · 열녀비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충신 · 열사와 관련된 비는 사당이나 단소(壇所)에 부속되는 경우가 있다.
특수한 비로는 개인의 일대기, 역사적 사건, 법령이나 포고문 따위를 새긴 것도 있는데 이 가운데 공지사항을 새긴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비문이라 하기는 어렵다. 또 하마비(下馬碑;푯돌)나 제석(題石) · 석표(石標) 등도 비문이 없으므로 역시 비라 하기 어렵다. 돌에다가 개인의 시가나 산문을 새긴 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기념비라 할 수도 있겠으나 비문의 통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따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석비의 형태는 비석을 받치는 대좌(臺座), 비문을 새기는 비신(碑身), 그리고 비신을 덮는 개석(蓋石) 또는 관석(冠石)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대좌는 비신받침으로 거북모양을 조각한 귀부와 네모로 깎은 방부(方趺)의 두 가지가 있다. 어느 것이나 위에 직사각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끼우게 되어 있다.
대좌로 귀부를 많이 쓰게 된 것은 거북이 수명장존(壽命長存)을 상징하는 신령스런 동물로 인식되어왔으므로, 비문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상징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귀부의 귀두(龜頭)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장 오래된 형태는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에서 볼 수 있다.
방부는 네모의 대석에 아무 수식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어떤 비에서는 돌려가며 꽃잎을 새기거나 2∼3단의 농대(壟臺) 위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비신은 대개 긴 직육면체(直六面體)로 깎아 세우는데, 앞면을 비양(碑陽), 뒷면을 비음(碑陰)이라 하며, 비문은 주로 비의 음양면에 새긴다. 비신의 상단부 또는 이수에 비의 명칭을 새기는데, 이것을 제액(題額)이라 한다.
전서로 쓴 것을 전액(篆額), 예서로 쓴 것을 예액(隷額)이라 하기도 한다. 제액 가운데 비신의 상단에 가로로 돌려가며 새긴 것을 횡액(橫額), 비양에 세로로 쓴 것을 종액(縱額)이라 한다. 횡액을 쓰는 경우, 비문은 대개 비음에서 시작하여 끝나지만 짧은 명문(銘文)은 종액의 좌우에 나누어 새기기도 한다.
비신에 새기는 비문에는 그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글을 새긴 각수(刻手), 또는 그 비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열기(列記)하기도 하였다. 비신의 가장자리에 봉선(封線)을 넣거나 문양을 새겨 장식하기도 한다.
천태시조(天台始祖)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인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1963년 지정)의 비신에는 사방으로 당초문을 새기고 상부에 용를 새겨 장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자연석에 비신의 윤곽을 선각하여 비문을 새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대개 대석과 개석이 생략된다. 개석은 관석이라고도 한다.
그 형상에 따라 이수 · 가첨석(加檐石) 등으로 불린다. 원래는 개석이 없이 비신의 상부를 둥글게 처리한 것을 따로 갈이라 하여 비와 구별하였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수를 갖춘 것도 갈이라 하기도 하고, 이수가 없는 것도 비라 하기도 하여 구별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수란 이무기를 새긴 개석이다.
이무기는 용의 형상과 같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용은 뿔이 있는데 비하여 이무기는 뿔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 한대(漢代)에는 용과 이무기가 공용되다가 당대에 이(螭 : 이무기)로 통일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성이나 돌다리 또는 일반 건축물의 장식물에도 이수가 사용되었다.
비에 새겨진 우리나라의 이수는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한 쌍의 이무기가 마주 대하는 중국 것과는 달리, 세 쌍이 서로 뒤엉킨 농주(弄珠) 형태로 중하부에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난 규형(圭形) 또는 네모꼴의 전액 주위에 빽빽하게 새겨졌다.
이수가 변형되어 단순히 이수의 윤곽만을 나타내거나 꽃잎의 문양만을 새긴 것을 관석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개석은 대개 개화(開花)의 형상을 취하여 그 꼭대기에 화심형(花心形)의 꼭지를 두는 것이 보통으로 이것이 화관석(花冠石)이다. 또 이수나 화관석 외에 지붕모양의 개석을 가첨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여 매우 단순한 것부터 정교한 것까지 있는데 조선시대에 주로 성행하였다.
고구려 석비로 대표적인 것은 만주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414년)와 충청북도 충주의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480∼481년)이고, 백제 석비로 대표적인 것은 충청남도 부여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654년)이다.
신라 석비로는 경상북도 영천(永川)의 청제비(菁堤碑, 536·798년)와 충청북도 단양의 적성비(赤城碑, 545∼551년), 경상남도 창녕(昌寧)의 신라진흥왕척경비(新羅眞興王拓境碑, 561년)와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巡狩碑, 568년), 그리고 경주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591년경)와 대구의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 등이 유명하다.
이 가운데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는 장대한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만든 것인데, 형태는 서로 비슷하나 광개토대왕비에 비해 중원고구려비는 그 규모가 작아 마치 그대로 축소시킨 것처럼 보인다. 사택지적비 역시 네모의 석주형으로 화강암의 표면을 잘 다듬고 구획을 친 다음 한 칸에 한자씩 글자를 음각하였다.
신라의 농경수리에 관한 영천청제비(보물, 1969년 지정)는 고신라와 통일신라의 두 시기에 걸쳐 양면에 그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자연화강석 양쪽을 가공하여 세운 비석이다. 창녕의 척경비 역시 자연석의 한쪽 면을 간 다음 돌의 생김새에 따라 가장자리에 윤곽선을 두르고 그 안쪽에 글자를 새겼다.
경주남산신성비는 4기(基)의 빗돌(비석)의 조각이 발견, 조사되었는데, 비의 형태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으며, 앞뒤가 평평한 자연석 그대로의 비면에 비문을 음각하였다. 단양의 적성비와 대구의 무술오작비 역시 화강암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아랫 면을 갈아서 비문을 음각한 형식의 비이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규형 석재를 다듬어 만든 신라시대의 전형적 양식의 석비로서, 비신 상단은 개석을 씌운 듯한 흔적이 있으며, 하단은 자연 암반에 2단의 층을 만들어 비신을 세웠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의 석비 양식은 자연석이나 규형의 석재를 다듬어 연마한 비면에 구획선을 긋거나 네모의 구획을 이룬 다음 비문을 각자한 비교적 단순한 솜씨의 비인데, 개석은 확실하지 않다.
대좌는 따로 만들지 않고 자연석 위에 세우거나 자연스럽게 얹어놓은 것이 일반적 형태이다. 이러한 삼국시대 석비의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7세기 후반에 이르면 정형화된 중국 당대의 석비 양식이 들어와 자연석 양식에서 벗어나 보다 인공이 많이 가해지는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단순 소박한 석비 양식에서 당대 양식으로 바뀐 대표적인 예는 경주 태종무열왕릉비이다. 중국의 경우 주대(周代)에 시작된 목비가 후한시대 · 남북조시대를 거쳐 당대에 이르러 비로소 이수 · 비신 · 귀부를 갖춘 전형적 중국 석비의 양식이 확립되었고 그 이후 석비의 전형이 되었다.
이런 당대 양식은 위에서 소개한 태종무열왕릉비에서 비로소 이수 귀부를 갖추어 나타났고, 663년경 부여의 당유인원기공비(보물, 1963년 지정)의 이수에서도 그 유형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같은 7세기의 후반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귀부와 김인문묘(金仁問墓) 앞의 귀부 등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
태종무열왕릉비는 현재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는데, 귀부는 매우 사실적으로, 거북의 목을 길게 앞으로 빼고 있는 상태이고, 귀갑(龜甲)은 육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수는 당대 석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둥근머리의 훈(暈)과 비슷하게 좌우에서 세 마리씩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 싸우는 듯한 모양을 하고, 뒷발로는 보주(寶珠)를 움켜 쥔 형상을 하고 있다.
이수 전면 중앙 부분에는 세로 42㎝, 가로 33㎝의 제액을 만들어 그 안에 전서로 ‘太宗武烈王之碑(태종무열왕지비)’라고 양각되어 있다. 귀부의 거북은 입을 다물고 눈을 크게 떠 생동감을 보이고 있으며, 머리 · 목의 주름, 발가락이 모두 사실적이며 힘찬 모습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조기술 및 석조공예의 발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조각 석비라고 할 수 있다.
이 무열왕릉비와 함께 전형적인 당대 석비의 양식을 보인 부여의 당유인원기공비는 귀부는 없고 이수와 비신만 남아 있으나, 상원하각(上圓下角)의 규형에 쌍룡을 조각한 통일신라 초기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7세기 후반에 정형화된 석비의 양식은 8세기에 들어 성덕왕릉(聖德王陵)의 귀부(754년경)와 고선사지(高仙寺址)의 귀부로서 무열왕릉비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세부에서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다시 9세기에 이르면, 귀부는 머리가 직립하고 세부가 변화하고, 이수도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 바뀌어 10세기 고려 석비의 선행(先行)양식으로 변하여갔다. 9세기 무렵에 제작되어 현존하는 석비로는 무장사아미타불조상탑비(䥐藏寺阿彌陀佛造像塔碑, 801년경)를 비롯하여, 흥덕왕릉귀부(興德王陵龜趺, 837년경) ·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碑, 861∼893년경)가 있다.
또 쌍봉사철감선사탑비(雙峯寺澈鑒禪師塔碑, 868년) · 성주사지낭혜화상일월보광탑비(聖住寺址朗慧和尙日月寶光塔碑, 898년) · 월광사지원랑선사탑비(月光寺址圓朗禪師塔碑, 890년) ·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 9세기 후반) ·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禪林院址弘覺禪師塔碑, 886년) ·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887년)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923년) ·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陵空塔碑, 924년) 등이 있다.
무장사아미타불조상탑비의 쌍귀부(雙龜趺)에는 거북의 머리가 직립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귀두는 반용두화(半龍頭化)한 변화를 나타냈다. 이 쌍귀부는 현재 귀두가 모두 절단되고 이수의 일부도 방치된 상태이나, 귀부의 등 중앙 부분에 장방형의 높은 비좌(碑座)가 설정되어 그 사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된 점이 매우 특이하다.
절단된 이수는 반룡(蟠龍: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땅에 서려 있는 용)이 운기문(雲氣文) 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움켜쥔 모양을 하고 있는데, 9세기초까지 이수가 남아 있는 중요한 예가 된다. 19세기 전반의 귀부 직립 양식은 이밖에도 흥덕왕릉 귀부에서 더욱 뚜렷한 예를 볼 수 있다.
9세기 후반에 건립된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의 경우, 현재 비신은 없어진 채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는데, 귀두의 용두화가 뚜렷할 뿐 전체적으로는 태종무열왕릉비 귀부의 모양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쌍봉사철감선사탑비도 현재 비신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귀부는 네모꼴의 대석 위에 직립 용두화한 귀두에 여의주가 물려 있고, 귀두의 끝에 뿔을 장식한 것 같은 돌기가 있다.
특히 목 부분에는 파충류의 주름잡힌 복갑(腹甲)과 같이 중첩문(重疊文)이 조각되어 있고, 대석을 딛고 있는 네 발은 각각 발가락이 세개로 되어 있다. 이수의 형태도 이룡(螭龍:뿔 없는 용)형식이 생략되니 운룡문만이 사면에 조각되고, 그 뒤로 연꽃잎을 둘러 이수 중앙에 제액을 두었으며, 정상에는 3개의 화염보주를 설정한 것으로 9세기 후반 석비의 대표적 예의 하나이다.
이들에 비하여 같은 9세기 후반에 건립된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普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886년경)는 비신은 물론 귀부 · 이수까지 갖춘 완형의 석비이다. 귀부의 머리는 똑바로 세워진 목 위에 용두화하여 매우 사나운 인상을 주고, 귀부의 목에는 파충류의 복갑 같은 비늘이 있으며, 정연한 육각형의 귀갑이 등 전체를 덮고 귀갑 위의 비좌에는 연꽃잎무늬의 띠를 둘렀다.
이수는 하단에 연꽃잎무늬를 두르고 그 위로 구름무늬를 둘러 그 안에 대칭으로 이룡을 새긴 대표적 석비의 하나로서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와 비슷한데, 특히 이수의 정상 연꽃잎 위에 보주를 얹은 것이 특이하다.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의 경우, 귀부는 바로 세운 목 위에 귀두는 용두화하고 두 눈은 툭 불거져서 전체적 인상이 사납게 느껴지며, 귀두 정상에는 한 개의 뿔을 세운 흔적이 있다. 비좌에는 구름무늬와 안상(眼象)을 조각한 것이 특이하고, 이수는 구름무늬와 안상을 두른 위에 이룡이 운기문을 몸에 감은 듯 제액을 중심으로 대칭 배치되었다.
성주사지낭혜화상일월보광탑비는 통일신라시대 석비로서는 최대의 거작이다. 귀부는 땅에 묻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노출된 귀두는 환상적인 괴수형의 용두인데, 머리 위에 한 개의 뿔이 있고, 쫑긋한 두 귀로부터 턱에 걸쳐 수염이 덮여 휘날리는 듯하며, 반개한 입과 불거진 두 눈을 하고 있다. 목은 뒤로 젖혀진 직립형이고 잔잔한 비늘이 선각되어 있다.
귀갑의 중앙에는 큼직하고 깊게 조각된 구름무늬 위에 비좌를 마련, 안상과 연꽃잎무늬의 띠를 둘렀다. 이수는 연꽃잎과 구름무늬로 조각한 위에 이룡이 대칭으로 각각 두 마리씩 새겨진 웅대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월광사지원장선사탑의 귀부는 귀두가 역시 용두화하였으나 목이 짧고 목부분 밑으로 복갑을 파상문으로 새겼다.
비좌에는 구름무늬가 소용돌이치듯 힘차게 새겨지고, 그 중간 중간에 변화된 연꽃잎무늬를 끼워 넣음으로써 변화를 주었다. 이수는 매우 깊게 새긴 구름무늬 사이에서 용 두 마리가 구슬을 다투듯 새겨져 마치 이수 전체가 약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귀부는 네모난 대석 위에 네발을 디딘 짧은 모습이며, 귀두는 직립으로 용두화하였으나 조각수법은 사실성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봉림 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는 통일신라시대 말기를 대표하는 석비로, 귀부는 짧고 직립한 목 위에 비대한 용두가 여의주를 물고 있고, 귀부의 등에는 이중연대(二重緣帶)를 양각한 직육각형의 귀갑문을 배치하였다. 비좌에는 사면을 구름무늬로 새기고 그 상단에 연꽃잎무늬의 띠를 둘렀다.
이수는 중앙에 네모꼴의 제액을 마련하고, 상부에 화염에 싸인 보주를 향해 양측면에서 각각 두 마리의 이룡이 서로 엉클어져 싸우는 듯 구름무늬에 싸여 있다. 비신은 다른 비에서 보기 힘든 운룡문이 양측면에 조각되어 고려시대 석비에 나타나는 운룡문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전체적으로 섬세 유려하고 형식화된 느낌을 준다.
이상 통일신라시대의 석비 양식을 개괄해보면, 7세기 후반 무열왕릉비에서 8세기에 이르기까지 귀부는 목을 앞으로 쭉 뻗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다문 사실적 형상으로 박력이 넘치고 있다. 귀갑은 사실적인 중첩 귀갑문을 표현하였고, 귀두 · 목부분 · 발가락 등 전체가 박진감 넘치는 사실적 조각으로 나타났다.
머리가 둥근 형태의 이수에 양각된 여섯 마리 이룡의 조각수법 또한 사실적이며, 귀갑 중앙에 설치된 비좌 주변에는 간결한 연꽃잎무늬의 띠가 둘려 있다. 9세기에서 10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세부적인 변화가 생겨 거북의 목은 직립하고 머리는 용두화 하였으며 귀갑은 어깨너머까지 두텁고 무겁게 덮여지며 귀갑문은 도식화되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이수 역시 둥근 머리모양에서 관형 또는 개형(蓋形)으로 변화되었다. 비좌에는 대부분 구름무늬와 연꽃잎무늬를 혼용하면서 높은 비좌대를 이루고 비좌의 각면에는 안상 · 십이지상 · 비천상(飛天像) 등을 다양하게 조각하고 있다. 이수 정상에는 운룡문을 새기고, 화염에 싸인 보주를 이룡이 서로 머리를 위로 들고 쟁주하는 모양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9, 10세기초의 통일신라 석비는 고려시대의 석비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의 석비는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 변모, 발전시켜서 이루어진 것이다. 10세기 전반으로부터 12세기초까지는 대체로 9-10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답습하면서 고려시대의 정교한 조각술이 반영되었고, 12세기 말기부터 14세기 중기에 이르기까지는 대좌 위에 귀부도 이수도 없고 비신의 위가 둥근 규형의 석비가 나타나 유행하다가, 14세기 후반에는 지붕모양의 이수를 가진 옥개형(屋蓋形)이 출현하였다.
통일신라 말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석비로는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塔碑, 938년)를 비롯하여 흥법사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 940년) ·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943년) · 흥녕사징효대사탑비(興寧寺澄曉大師塔碑, 944년) ·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946년) · 대안사광자대사탑비(大安寺廣慈大師塔碑, 950년경)등이 있다.
또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965년), 여주의 고달사지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址元宗大師慧眞塔碑, 975년), 서산의 보원사지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址法印國師寶乘塔碑, 978년), 연곡사현각선사탑비(鷰谷寺玄覺禪師塔碑, 979년), 강진의 월남사지석비(月南寺址石碑, 10세기 후반) 등이 있다.
11세기 것으로는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비(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 1017년), 원주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 1085년), 칠곡의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 1132년) 등이 있다. 양평에 있는 보리사대경대사탑비의 귀부는 여의주를 물고 직립 용두화한 귀두에 육각귀갑문(六角龜甲文)을 이루고 있는데 귀부의 전체적 모양은 경박한 것이 특징이다.
이수는 사실적이나 귀부와 비례상 조화되지 않으며, 구름무늬와 혼합된 용 두 마리가 제액을 중심으로 서로 구슬을 다투듯 힘차게 새겨져 있다. 원성의 흥법사진공대사탑비는 귀부에 용두화한 귀두에 여의주가 물려 있고 목은 짧으며 직립되어 있다. 귀부의 등은 육각형의 귀갑으로 장식되었고, 등의 비좌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이수는 제액을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이 대칭되어 있으며, 힘찬 운기문들과 조화를 이루게 조각되어 있다. 중원의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는 용두화한 직립 귀두가 여의주를 물고, 육각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귀갑 중앙에 알맞은 비좌를 설정하였다.
거대한 이수에는 구름무늬와 혼합된 이룡이 제액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으나, 이 반룡들은 귀두와 같이 여의주를 물고 바깥을 향하여 있는 형상으로, 전체적으로 귀부와 이수는 딱딱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비좌가 낮게 설정된 것이 이채롭다. 영월의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 역시 용두화한 귀두, 화염에 쌓인 보주를 중심으로 대치한 이룡이 조각된 이수로 이루어졌다.
강진의 무위사선사대사편광탑비의 귀부는 용두화 귀두에 여의주가 물려 있고, 두 귀는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을 날리는 듯 사납게 표현되어 있으며, 귀부의 등은 육각귀갑문, 그 중앙에 비좌를 배치하였으며 이수에는 연화문을 장식한 위에 서로 엉킨 운룡문을 조각하였다.
곡성의 대안사광자대사비는 귀부의 목이 짧으나 용두화한 귀부가 정면을 향한 형태로 사실감 있게 조각되었다. 귀부의 등에는 육각귀갑문, 그 중앙에 사면을 와운문(渦雲文) 장식의 비좌가 있고, 비신은 전하지 않는다. 이수의 네 모퉁이에는 이룡이 조각되어 있고, 제액 상부 중심에는 극락조로 보여지는 조형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의 조형 방법은 통일신라 말 석비의 기본양식에 바탕을 두면서 장엄성을 확대시킨 예라 할 수 있다. 문경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역시 10세기 전반의 일반적인 고려 초기의 석비양식을 따라 귀부는 짧은 목 위에 용두화한 귀두, 이수는 화염보주를 중심으로 엉클어진 이룡이 구름무늬와 조화를 이루어 조각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강한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다.
10세기 후반의 여주 고달사지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통일신라의 석비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수법으로 조각된 예이다. 용두화한 귀두는 험상궂은 인상을 주고, 귀갑은 깊게 조각한 육각귀갑문이며, 구름무늬와 연꽃잎이 혼합된 비좌가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양식과 큰 차이가 있어 고려 초기의 발랄한 기상을 보이고 있다.
서산의 보원사지법인국사보승탑비는, 탑비가 매우 높고 크며 귀부는 용두화한 귀두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나 거북의 몸체는 머리에 비하여 퍽 왜소하며 도식화되었다. 귀부의 등에 마련한 귀좌는 문양이 없는 단순한 모양이고, 이수는 구름무늬와 조화를 이룬 네 마리의 용이 중앙을 향하여 고개를 쳐들고 구슬을 다투는 형상이다.
귀부에 비하여 이수가 너무 큰 느낌이고 전체적으로 둔탁한 감을 준다. 연곡사현각선사탑비 역시 현재는 비신이 없어진 채 귀부와 이수만 남은 것으로 그 양식은 10세기 후반의 다른 비와 같다.
이상 10세기의 고려 석비를 개괄하면, 통일신라의 9세기 및 10세기초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구별하기 힘든 예도 있기는 하나, 대체로는 귀두가 환상적이고 험상궂은 인상을 주며 턱에는 짧은 수염과 같은 것이 붙어 있다. 그리고 귀부의 등에 배치한 비좌는 비교적 낮고 주위에는 간단한 연화문과 운문을 조각하였다.
비신 위에 놓이는 이수는 보관형(寶冠形)인데 복잡한 운룡문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10세기 양식은, 11세기초의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비에 이르러서는 이수가 작아지면서 모자모양으로 변하고, 귀부에도 귀두의 입 양쪽에 청자어룡형주자(靑瓷魚龍形注子)에서 보는 바와 같은 지느러미가 크게 달려 있다.
네모난 여의주를 용두화한 귀두 · 비좌 · 이수의 양식은 앞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원성의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는 짧은 목의 용두화한 귀두에 큰 지느러미가 달리고, 귀갑에는 卍자와 연꽃잎무늬가 교대로 들어 있다. 이수는 하단에 막(幕) 같은 것이 드리우고, 이수 중간의 제액 주변을 섬세한 운문대로 장식하였으며, 그 위로 또 다른 화염에 싸인 보주를 새긴 것도 주목되는 기법이다.
천안의 봉선홍경사비갈(奉先弘慶寺碑碣, 1026)에 이르면 귀두는 괴수형으로 용두화하여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며,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같은 날개는 귀두 좌우를 넓게 장식하고 있다. 이수는 도식화한 운룡문으로 그 형상은 모자를 쓴 듯 산의 모양을 하고 있다.
11세기 후반의 원성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1085)는 이수가 처마를 번쩍 들어올린 듯한 지붕모양이고, 그 꼭대기에는 상륜부(相輪部)가 마련되었다. 비신의 양측 면에는 운룡문을 조각하는 등 장식성을 강조하였다. 귀부는 귀두 양쪽에 수염이 나고, 귀갑에는 王자를 새긴 네모꼴의 귀갑문이 전체를 덮고 있어 마치 수놓은 비단을 씌운 듯한 장식효과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예는 12세기 후반의 천봉사대각국사비로 이어진바, 귀부는 장방형의 대좌로 대신되고, 이수는 옥개형으로 변하였다. 고려의 석비양식은 12세기 전반 무렵부터 서서히 통일신라 양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여 1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규수형(圭首形)으로 변해갔다.
그 예로서는 용인의 서봉사현오국사탑비(瑞鳳寺玄悟國師塔碑, 1185년)와 포항의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1224년), 그리고 부여의 보광사중창비(普光寺重刱碑, 1358년) · 억정사대지국사비(億政寺大智國師碑, 1393년) 등이 있다.
서봉사현오국사비는 비신 상단 양각면을 귀접이한 규형 비신에 지대석은 네 변을 접은 간략한 형태인데, 점판암과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보경사원진국사비는 이수가 없이 비신 상단 양끝을 귀접이한 규수형이다. 귀부와 대석은 한덩어리이고, 용두화한 귀두에는 여의주가 물렸으며, 특히 비신 둘레에 당초문이 새겨졌다.
보광사중창비 역시 규수형 비신의 하나로, 상부에 귀접이, 비신 둘레에 연결된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억정사대지국사비는 비신의 상단부를 좌우로 크게 귀접이 하였고, 장방형의 대좌를 갖추었다. 이와 같이 12세기 후반에서 14세기 후반까지는 귀부와 이수는 퇴화하고 높은 대석 비좌와 비신의 상단이 규형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높은 비좌와 함께 나타난 옥개형 이수를 갖춘 비석양식은 조선시대양식의 규범을 이루는데, 그 예로는 합천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여주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1379년) · 대장각기비(大藏閣紀碑, 1382년), 화성의 영성사대각원조탑비(影聖寺大覺圓照塔碑, 1386년) 등을 들 수 있다.
반야사원경왕사비는 귀부 · 대석이 모두 평박하고, 간략하게 조형한 옥개형 개석 등 모두가 기존의 양식에서 퇴화한 모습이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의 조형은 대장각기비와 같으나, 대석을 3단으로 중첩시켜 상단의 대석에만 앙련대를 설정, 그 위에 세운 비신은 양측에 장방형 기둥을 세웠으며, 옥개석에는 목조건물양식이 생략되어 나타나 있다.
대장각기비에서도 장방형의 연꽃잎 대석과 옥개석으로 생략 변화한 양상이 공통적이다. 이 같은 양식은 영성사대각원조탑비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져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신, 그 위에 우진각형 옥개석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리하여 고려시대의 석비 양식은 조선시대 석비 모체가 되어왔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비는 승려의 탑비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사대부의 능묘비나 신도비가 주로 세워졌고, 그밖에 다양한 내용의 비가 세워졌다. 이들 조선시대 석비의 양식은 고려 후기 양식인 규수형이다.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비좌도 장방형이 아니고 귀부를 갖춘 경우라도 귀두는 거북도 용도 아닌 괴물이 되고, 귀갑도 정형을 벗어나서 비좌에도 연잎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또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전통적인 석비양식보다 당 · 송대의 중국 석비를 더 많이 본받은 점이 주목된다.
그 예로는 일제시대 때 옮겨져 온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서 서울 용산의 철도박물관에 있는 개성의 연복사중창비(演福寺重刱碑, 1424년), 서울의 원각사비(圓覺寺碑, 1471년) 등이 있는데, 이들은 당대(唐代) 석비와 같이 이수와 비신이 한덩어리의 돌로 이루어진바, 이수 부분은 엉클어진 이룡이 보주를 움켜쥔 형상을 하고, 중앙에 네모꼴의 제액이 마련되어 있다. 귀부는 환상적인 용두가 아니라 단순한 귀두로 되어 있다.
이들 석비의 대표격인 원각사비의 경우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으로 당비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의 조각에서는 조선적인 특색을 보였다. 귀부의 귀두 · 귀갑은 모두 퇴화하였으나 석물로서는 괴량감(塊量感)을 보여주었고, 등에는 연잎을 새겨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당식의 석비는 16세기 이후부터 쇠퇴하고, 고려시대 후반에 만들어지던 규수형과 옥개형을 단순화시킨 양식이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어 수많은 능묘비 · 대첩비 · 송덕비 · 사적비 · 효자비 등이 건립되어 한국을 석비의 나라로 불리게 하였다.
당대 석비를 따른 원각사비 계통의 예로는 17세기 전반의 서울 송파에 있는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 1627년)와 영암 도갑사도선국사비(道岬寺道銑國師碑, 1636년) 등이 있는데, 특히 청태종공덕비는 전기 양식을 충실히 따른 대비이다. 고려 석비의 양식을 따른 예로는 해남의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1688년), 여수의 좌수영비(左水營碑) 및 타루비(墮淚碑, 1620년) 등 그밖에 18∼19세기에 세워진 수많은 신도비 · 묘비 · 사적비 · 송덕비가 있다.
비문의 문체는 산문으로 된 서(序)와 운문으로 된 명(銘)으로 대별된다. 서와 명으로 된 비문을 대개 비명병서(碑銘幷序) 또는 비명이라 부른다. 서가 없이 명으로만 된 비문이나, 명이 없이 서로만 된 비문도 있기는 하나, 이런 것은 비송(碑頌) 또는 비기(碑記)라 하여 따로 구별하기도 한다.
비서는 비문을 쓰는 경위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본문에 의의를 부여하는 곳이다. 비명은 4언 ·5언 ·7언 등의 운문으로 이루어진다. 명에서는 짧고 화려한 수식을 동원하여 공덕을 찬양하고자 ≪시경 詩經≫의 송(頌)이나 아(雅)와 같은 전아한 시가에 그 근원을 둔다.
명이 없는 비기는 원래 한문 문체의 기(記)에서 온 것으로 기사(記事)를 뜻하는데, 사적비 따위 사실을 기록하는 비문의 많은 부분이 이런 비기의 형식을 취한다. 비문을 서술하는 형식과 그 순서는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는 내용에 따라 순수비문 · 기공비문 · 능묘비문 · 신도비문 · 탑비문 · 사적비문 · 사묘비문 · 정려비문 · 송덕비문 등으로 나누어진다.
순수비문의 예로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신라시대 영토확장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기공비문은 군장(軍將)의 전공을 기리고, 그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관구검기공비 · 유인원기공비 등이 있다. 능묘비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실물이 현전하는데 대개 주인공의 생몰연대 및 그의 행적을 적는다.
신도비문은 조선시대에 당상관 이상의 고관을 지낸 사람에게만 세워주던 비인데, 뒤에 문중의 건비가 성행하면서 이런 제약이 흐려졌다. 신도비문은 비명, 주인공의 가계(家系) · 행적 외에 글을 지은이와 글씨를 쓴 이, 그리고 건립 연 · 월 · 일 등을 기록한다. 탑비문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예가 보이고 있으나, 특히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탑비가 줄고 신도비가 성행하였다.
사적비는 삼국시대에 경주 남산의 신성비에서 비롯되어 전시기에 걸쳐 건립되었다. 사적비문의 내용은 공사의 동기 · 진행과정 · 동원인력 등 일반적 사항과 때로는 관직명이 적히기도 하여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사묘비는 사당 · 묘정 · 서원 등에 건립되는 비인데, 그 비문에는 사묘의 설치된 유래와 관련된 인물의 공훈이나 사적을 적는다.
정려비는 효자비 · 효부비 · 열녀비로 나누어 대개 문중에서 건립하는데 조선시대에서는 유교사상 아래서 크게 유행하였다. 정려비문은 사적과 찬송이 그 주요내용이 된다. 송덕비문은 대개 선정비문과 시혜비문으로 갈라지는데, 운문으로 그 공적을 미화해서 표현하고, 글지은이는 밝히지 않고 세운 사람이나 동리를 밝힌다.
비문의 서체에는 예서 · 해서 · 행서 등이 있는데, 전서는 조선 숙종 때 허목(許穆)이 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있을 뿐이다. 서체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어, 점제현신사비는 고예(古隷), 관구검기공비 · 광개토왕릉비는 한예(漢隷)의 분서(分書)에 속하며, 해서가 가장 많고 다음이 행서이다. 비의 제액은 대부분 전서로 썼으므로 전액이라고도 한다.
문체는 운문 · 고문이 있으나, 당대(唐代)부터 별도로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 네 글자와 여섯 글자로 댓구를 이룬 글체)가 유행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신라 이후의 금석문은 대부분 이 문체를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진흥왕순수비는 한국식 산문이고, 특히 창녕의 척경비에는 한국 고유의 명칭과 이두(吏讀)도 적혀 있다.
비문 글씨 중에서 왕희지(王羲之)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신라 때는 경주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비와 양양의 사림사홍각선사(沙林寺弘覺禪師)의 탑비가 있다. 고려 때 것으로는 군위의 인각사보각국존정조(麟角寺普覺國尊靜照)의 탑비가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의 비이다.
행서로 쓰인 대표적인 것은 원주의 흥법사진공대사탑비이고, 우리 나라 사람의 글씨를 집자한 비는 지금 경복궁에 옮겨진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의 탑비인데, 이는 신라 때의 김생(金生)의 필적을 집자한 유일한 것으로 동양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비는 사적비와 고승의 탑비가 주를 이룬다.
이런 비는 모두 왕명으로 국가에서 세우는 것이어서 문장이나 글씨를 당대 일류 명인을 선정하므로 찬자(撰者)나 서가(書家)가 모두 정성을 기울여서 만든 문화의 한 정수라 할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당초(唐初)의 여러 대가의 서법을 따랐는데 그 중에서 구양순(歐陽詢)의 글씨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구양순체의 대가로는 구족달(具足達) · 한윤(韓允) · 민상제(閔賞濟) · 안민후(安民厚) · 임호(林顥) · 오언후(吳彦侯)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작품은 당 · 송대의 비첩(碑帖)에 비해 손색이 없다. 또 이원부(李元符) · 장단열(張端說)은 우세남(虞世南)의 필법에 정통하였으니, 반야사원경왕사비는 이원부가 우세남체로 쓴 것이고,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는 안양(安養)이 구양순체로 쓴 비이다.
구양순체를 쓰지 않은 예로는 청주 용두사지당간지주(龍頭寺址幢竿支柱)의 철당기(鐵幢記)가 유공권체(柳公權體)이며, 채충순(蔡忠順)이 쓴 개성의 현화사비(玄化寺碑)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한 행서이다.
고려 중기에 이르면, 구양순체의 유행이 사라지고 왕희지의 서법에 중국 남북조이래 흘러 내려온 사경(寫經)의 서법을 융화시켜, 부드럽고 우아한 서풍을 이룩한 탄연(坦然)의 뒤를 이은 중 기준(機俊)이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의 기명(記銘)을 썼다.
무신란 이후에는 유공권체의 서봉사현오국사탑비와 김효인(金孝仁)의 서체인 보경사원진국사비가 뛰어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았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신도비건립의 성행, 문중 중심의 건비의 성행으로 발전하면서 비문에 새긴 서체도 고려시대와 같은 일정한 틀을 벗어나 훨씬 다양화하고 대중화되었다.
비의 발생이 장의와 관련되어 있는 만큼 장례의 변천에 따라 비의 양식이나 내용도 변화해간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덤의 위치나 표지하는 정도이던 것이, 점차 사자를 추모하고 생전의 공적을 찬양하는 성격으로 바뀌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징표로 변질되었다.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인 양반들은 자신의 신분적 우월감을 항상 의식하고 조상의 사적을 비에 새김으로써 가문의 빛남을 자랑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재물을 써서 당대의 저명한 문장가에 청하여 비문을 짓고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를 받아서 화려한 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도 다분히 형식에 흘러서, 사자의 공덕을 과장 찬송하기 위해 과분한 미사여구를 나열하고, 혁혁한 가계(家系)를 열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 과시나 문중의 우월 표시라는 부정적 측면만을 보고 한국의 비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충 · 효 · 열 등 유교적 덕행을 실천한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후인의 귀감을 삼으려는 것이 건비의 본래 의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