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시행된 정시는 왕비의 종기가 나은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서 양정호(梁廷虎) 등 19명을 뽑았다. 그런데 시취(試取)를 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부정행위가 있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즉, 당시의 시관 이돈(李敦) 등이 오수원(吳遂元)·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 형제·이빈흥(李賓興)·윤팽수(尹彭叟) 등 자기 친구의 아들과 가까운 친지에게 미리 시제(試題)를 가르쳐 주어 합격시켰는데, 예컨대 이헌영 형제 시권에 ‘龍(용)’자를 쓰게 하여 김오(金吾)에게 심사하게 하였다.
또한 오수원·이헌영·이헌장 형제 등에게는 시권에 일종의 암호 표시인 ‘鶯(앵)’자를 써서 글을 짓게 하여 합격시켰으며, 이진급(李眞及)에게는 시험이 끝난 뒤에 제출하게 하여 합격시키는 등의 부정행위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시관인 김창집(金昌集)·이돈을 비롯하여 정몽선(鄭夢先)·김진규(金鎭圭) 등 수십명의 연루자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 뒤 김창집은 파면되었으며, 이돈은 여러 차례의 문초를 받고 죄가 드러나게 되어 그 해 12월아산현에 유배되었으며, 오수원 역시 양산역(良山驛)에 유배되는 등 많은 연루자들이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713년에 이르러 다시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여야 된다는 여론 및 상소가 있게 되어 다시 여러 차례의 심문과정을 거친 결과, 마침내 이돈·오수원·이진급 등이 처형당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