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9년(숙종 25) 단종 추존을 위한 왕위 복위를 경축하기 위해 증광문과를 설행, 한세량(韓世良) 등 34인이 합격을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언(正言) 이탄(李坦)의 상소로 이 과거 시험에 부정이 있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즉, 복시(覆試)에 등록관(謄錄官)·봉미관(封彌官)·서리 및 하인들이 청탁을 받고 입격시권(入格試券)에 다른 응시자의 피봉(皮封)을 붙여서 합격시킨 사례가 13건, 역서(易書 : 답안지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베끼는 것) 때 고쳐 써준 사례가 1건, 응시자가 소제(所製)의 문두(文頭)만 써서 시관에게 전해 합격한 사례가 1건, 응시자가 자호를 시관에게 알려 합격한 부정 사건 등이 계속 드러났다.
이 시험은 시험 자체가 무효로 되는 파방(罷榜)이 되는 등 당시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당시 상시관(上試官)이었던 예조판서 오도일(吳道一) 등 수 십 명이 절도(絶島)에 유배되었으며, 부동역서(符同易書)를 한 이제(李濟)·윤귀설(尹貴說) 등은 3년 동안 병역 복무[充軍]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 시험장을 지키는 고군(雇軍)들에게는 제주도에서 3년 동안 강제로 병역에 복무하게 하는 등의 조처가 취해졌다.
이와 같은 과거 시험에 대한 부정은 관련자들이 금력에 눈이 어두워 각자의 소임을 공정하게 수행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돈만 있으면 어사화도 얻을 수 있다(御賜花耶 金銀花耶).”라는 속언은 이러한 실정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