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필사본.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또는 ‘운연과안록(雲烟過眼錄)이라고도 한다.
≪완당선생전집 阮堂先生全集≫ 권1에 실려 있는 <진흥왕이비고 眞興王二碑考>에서 제시된 견해를 자세한 고증을 통해 대폭 수정하였다. 끝에는 친구 조인영(趙寅永)과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 등을 덧붙여 편찬하였다.
내용을 보면 먼저 황초령비를 판독, 고증하고 있다. 비문에 ‘8월 21일 계미(癸未)’라고 하고, 또 ‘세차(歲次) 무자(戊子) 추(秋) 8월’이라 한 것은, 이 때가 568년(진흥왕 29) 무자년이고, 대창(大昌)으로 개원(개원:연호를 고침)한 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어서 주(周)의 무제(武帝) 본기에 의하면, 8월 을축일(乙丑日)이 8월 초삼일인데 8월 21일이 계미일(癸未日)이 되므로 서로 일치됨을 고증하였다.
≪삼국사기≫ 및 ≪당서 唐書≫에 의하면, 시호는 왕이 승하한 뒤에 붙여주는 미칭(美稱:아름답게 이르는 말)으로 지증왕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제하였다.
이어 이 비에서는 그 제목에 ‘진흥대왕’이라 일컫고 있으며, 북한산비에도 역시 ‘眞興(진흥)’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진흥’은 시호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의 칭호임을 고증하였다.
≪위지 魏志≫의 예전(濊傳) 및 동옥저전(東沃沮傳)에 의하면 동옥저와 불내예(不耐濊)는 지금의 함흥을 지칭하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함흥땅은 분명 후한(後漢) 때부터 고구려에 속해 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비에서 “국경을 돌아보고 다스린다.”라고 한 것은 진흥왕 때 함흥이 신라의 관할로 되어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고증하였다.
≪삼국지≫ 직관지에 의하면 대등(大等)은 두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 비문에서도 대등이라는 명칭을 볼 수가 있는 바, 이러한 두 종류의 대등 이외에도 단순히 대등이라고 단칭(單稱:단 하나만의 일컬음)한 것도 있었다고 고증하였다.
비문 가운데 ‘거칠(居)’을 ‘거칠(居柒)’로 해석해, 이것이 거칠부(居柒夫)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증하였다. ≪당서≫ 신라전에 의거해 훼부(喙部)가 양부(梁部)로 된 근거에 대해서도 고증하였다.
≪삼국사기≫ 직관지 및 ≪당서≫를 인용해, 비문에 보이는 잡간(迊干)·대아간(大阿干)·급간(級干)·대사(大舍)·소사(小舍)·길지(吉之)는 각각 세번째·다섯번째·아홉번째·열두번째·열세번째·열네번째의 관직을 의미하므로, 비문에 기록된 것은 모두 질서 정연하다고 고증하였다.
또한, 복동지(服冬知)·비지부지(比知夫知)는 인명을, 오른쪽 변인 ‘阝’는 부(部)를, ‘혜(兮)’자는 인명의 아랫부분을, ‘전(典)’자는 관청이름을 의미한다고 고증하였다. 황초령에 대해서는 이곳을 초방(草坊)·초방(草方)·초황(草黃)·황초(黃草) 등으로 쓰는데, 유척기(兪拓基)가 소장한 ≪금석록 金石錄≫에 의해 초방(草坊)이 올바른 표기임을 고증하였다.
다음으로 북한산비에 대해 판독, 고증하였다. 이 비문은 연대가 마멸되어 그 건립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남천(南川)’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천(利川)에 남천군주(南川軍主)를 두었던 568년에서 576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고증하였다.
또한, 비문에 보이는 ‘태주(太主)’·‘충신정성(忠臣精誠)’·‘도인(道人)’·‘급간(及干)’·‘미지(未智)’ 등의 글자는 황초령비와 같다고 하였다. 부지(夫智) 또한 황초령비에 보이는 ‘대아간비지부지(大阿干非知夫知)’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해, 두 비가 동시에 세워진 것으로 고증하였다.
비문에 보이는 급간(及干)은 벼슬 이름이고, 내대지(內大智)는 인명이며, 간(干)은 아간(阿干)·잡간과 같은 의미라고 하였다. 군주(軍主)는 도독(都督)을 의미하며, 사(沙)는 부(部)이름이거나 사람이름의 윗부분으로 추측되며, 대나구지(大奈口智)는 대나마(大奈麻)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증하였다.
끝으로, 비문 첫째 줄에 ‘진흥(眞興)’의 ‘眞(진)’자가 확인되어 이 비가 무학(無學)의 비가 아니라 진흥왕순수비임을 고증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친구인 조인영과 권돈인에게 보낸 서간문이 있다.
북한산비에 대한 두 차례의 조사를 끝낸 다음, 동행했던 친구 조인영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북한산비가 황초령비와 같은 진흥대왕순수관경비(眞興大王巡狩管境碑)이며, 진흥이라는 시호와 상대등 거칠부의 관등으로 보아 진지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하며, 또한 황초령비와 서로 내용 및 글씨가 같으므로 같은 시기에 세워진 듯하다.”고 북한산비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결론짓고 있다.
또한, 그보다 15, 6년 뒤에 황초령비의 원석(原石)을 찾으려고 마침 함경감사였던 절친한 친구인 권돈인에게 부탁하는 편지에서 황초령비에 대해 지명·관명과 글자 한 획까지도 세세한 고증을 행하다 보니 한 권이나 되는 분량의 책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이 초기 견해를 자세한 고증을 거쳐 대폭 수정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책은 비문을 판독하는 데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 나라와 중국의 사적을 광범위하게 인용해 합리적인 고증을 시도하였다.
기본 자료의 조사에서도 크기는 물론, 위치와 형상 및 실체의 감정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을 기하였다. 김정희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수용해 고증 방법을 발전, 정착시켜 우리 나라 금석학(金石學)에 큰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