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전기, 지공거로 과거시험을 자주 주관하였고 한림학사, 내의령, 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그리하여 966년(광종 17)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지공거가 되어 최거업(崔居業) 등 진사(進士) 2명을 뽑았고, 972년(광종 23)에는 동지공거 김니(金柅)와 함께 양연(楊演)·유방헌(柳邦憲) 등 진사 4명을 뽑았으며, 이듬해에는 백사유(白思柔) 등 진사 2명을 뽑고, 974년(광종 25)에는 한인경(韓藺卿) 등 2명의 진사를 뽑았다.
그리고 977년(경종 2)에는 왕의 친시(親試)로 행해진 과거에서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고응(高凝) 등 6명의 진사를 뽑았으며, 979년(경종 4)에는 원징연(元徵衍) 등을 진사로 뽑았다,
983년(성종 2)에는 최행언(崔行言) 등 진사 5명을 뽑고, 이듬해에 이종(李琮) 등 진사 3명을 뽑았으며, 985년(성종 4)에는 진량(秦亮) 등 3명을 진사로 뽑았다. 또한 988년(성종 7)에는 이위(李緯) 등 진사 4명과 의업(醫業) 2명을 뽑았으며, 다음 해에는 최득중(崔得中) 등 진사 18명과 명경업(明經業) 1명 및 복업(卜業) 2명을 뽑고, 994년(성종 13)에는 복시(覆試)에서 최원신(崔元信) 등 진사 8명과 명경업 9명을 뽑았다.
왕융은 이외에도 975년에 대광(大匡) 내의령 겸 총한림(內議令兼摠翰林)으로 있으면서, 경종(景宗)이 즉위와 함께 왕비로 맞이한 헌승황후(憲承皇后)의 아버지 정승공(政承公: 신라 경순왕)을 상보(尙父)로 책봉하는 조서를 찬(撰)하였다. 997년(성종 16) 10월에는 성종(成宗)이 목종(穆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왕융은 평장사(平章事)로 있으면서 사면령(赦免令)의 반포를 요청하였다.
또한 왕융이 찬(撰)한 비문(碑文) 가운데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는 979년(경종 4년)에 찬한 연곡사(鷰谷寺)의 현각선사비(玄覺禪師碑)와 981년(경종 6)에 대광(大匡) 내의령 판총한림 겸 병부령(內議令判摠翰林兼兵部令)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아 찬술한 지곡사(智谷寺)의 진관선사오공탑비(眞觀禪師悟空塔碑)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 『보한집(補閑集)』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 (일지사, 1990)
- 허흥식, 『한국중세사회사자료집』 (아세아문화사, 1976)
- 허흥식, 『고려의 과거제도』 (일조각, 2005)
논문
- 강희웅, 「고려초 과거제도의 도입에 관한 소고」 (『한국사논문선집』 Ⅲ, 일조각, 1976)
- 이기동, 「나말여초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확장」 (『역사학보』 77, 역사학회, 1978)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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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임금이 몸소 과장(科場)에 나와 시험 성적을 살피고 급제자를 정하던 일. 또는 그 시험.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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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전남 구례군 연곡사에는 현재 비의 조각만 남아 있고 146자만 남은 비문의 탁본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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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경남 산청군 지곡사에는 현재 비가 남아 있지 않고 탁본만 전한다. 비문은 의천이 편찬한 『석원사림(釋苑詞林)』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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