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융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에,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독권관, 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지공거|대상|대광내의령겸총한림|독권관|평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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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고려 전기에,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독권관, 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광종부터 성종 때까지 12회에 걸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955년(광종 6)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대상(大相)의 관직으로 광평시랑(廣評侍郎) 서봉(徐逢)에 이어 두 번째 고려 사절로 후주에 다녀왔다.

966년 지공거가 되어 최거업(崔居業) 등 진사 2명을 뽑고, 972년 김니(金柅)와 함께 지공거가 되어 양연(楊演)·유방헌(柳邦憲) 등 진사 4명을 뽑았으며, 이듬해 다시 지공거가 되어 백사유(白思柔) 등 2명을 뽑고, 974년에는 한인경(韓藺卿) 등 2명을 진사로 뽑았다.

975년(경종 즉위년)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大匡內議令兼摠翰林)으로 있을 때 신라 왕 김부(金傅: 경순왕)를 상보(尙父)로 책봉하고, 도성령(都省令)의 관호(官號)를 내리는 조서를 찬(撰)하였다. 977년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고응(高凝) 등 6명을 진사로 뽑았으며, 979년 다시 지공거가 되어 원징연(元徵衍) 등을 진사로 뽑았다.

983년(성종 2)에는 최행언(崔行言) 등 진사 5명을 뽑고, 이듬해 이종(李琮) 등 진사 3명을 뽑았으며, 985년에도 진량(秦亮) 등 3명을 진사로 뽑았다. 988년 이위(李緯) 등 진사 4명과 의업(醫業) 2명을 뽑고, 989년 최득중(崔得中) 등 진사 18명과 명경(明經) 1명, 복업(卜業) 2명을 뽑았다.

994년 최원신(崔元信) 등 진사 8명과 명경 9명을 뽑았다. 997년 성종이 죽기 직전, 평장사(平章事)로서 사면령(赦免令)을 반포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981년에 찬한 강주(康州)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비(眞觀禪師碑) 비문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중세사회사자료집』(허흥식, 아세아문화사, 1976)
「나말여초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확장」(이기동, 『역사학보』77, 1978)
「고려초 과거제도의 도입에 관한 소고」(강희웅, 『한국사논문선집』Ⅲ, 일조각,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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