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융의 가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왕융은 955년(광종 6) 대상(大相)의 지위로 후주(後周)에 사신으로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다는 기록에 처음 보인다. 그는 그 뒤에 광종부터 성종 때까지 약 30여 년 동안 12회에 걸쳐 지공거(知貢擧)로 과거(科擧)를 주관하면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966년(광종 17)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지공거가 되어 최거업(崔居業) 등 진사(進士) 2명을 뽑았고, 972년(광종 23)에는 동지공거 김니(金柅)와 함께 양연(楊演)· 유방헌(柳邦憲) 등 진사 4명을 뽑았으며, 이듬해에는 백사유(白思柔) 등 진사 2명을 뽑고, 974년(광종 25)에는 한인경(韓藺卿) 등 2명의 진사를 뽑았다.
그리고 977년(경종 2)에는 왕의 주1로 행해진 과거에서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고응(高凝) 등 6명의 진사를 뽑았으며, 979년(경종 4)에는 원징연(元徵衍) 등을 진사로 뽑았다,
983년(성종 2)에는 최행언(崔行言) 등 진사 5명을 뽑고, 이듬해에 이종(李琮) 등 진사 3명을 뽑았으며, 985년(성종 4)에는 진량(秦亮) 등 3명을 진사로 뽑았다. 또한 988년(성종 7)에는 이위(李緯) 등 진사 4명과 의업(醫業) 2명을 뽑았으며, 다음 해에는 최득중(崔得中) 등 진사 18명과 명경업(明經業) 1명 및 복업(卜業) 2명을 뽑고, 994년(성종 13)에는 복시(覆試)에서 최원신(崔元信) 등 진사 8명과 명경업 9명을 뽑았다.
왕융은 이외에도 975년에 대광(大匡) 내의령 겸 총한림(內議令兼摠翰林)으로 있으면서, 경종(景宗)이 즉위와 함께 왕비로 맞이한 헌승황후(憲承皇后)의 아버지 정승공(政承公: 신라 경순왕)을 상보(尙父)로 책봉하는 조서를 찬(撰)하였다. 997년(성종 16) 10월에는 성종(成宗)이 목종(穆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왕융은 평장사(平章事)로 있으면서 사면령(赦免令)의 반포를 요청하였다.
또한 왕융이 찬(撰)한 비문(碑文) 가운데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는 979년(경종 4년)에 찬한 연곡사(鷰谷寺)의 주2와 981년(경종 6)에 대광(大匡) 내의령 판총한림 겸 병부령(內議令判摠翰林兼兵部令)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아 찬술한 지곡사(智谷寺)의 주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