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지곡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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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불교
유적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에 있었던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
이칭
이칭
국태사(國泰寺)
유적/건물
건립 시기
통일신라
소재지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웅석봉로 396 산청지곡사지 (산청읍 내리 772-4번지 외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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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지곡사는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내리 지리산 기슭에 있었던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고려 승려 진관과 혜월의 비가 건립되는 등 고려시대에 번성하였으며 조선 후기까지 선종의 법등을 이어오다 20세기 들어 폐사되었다.

목차
정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에 있었던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
개설

산청군 지리산 기슭에 위치한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에 가장 번성하였다. 산음을 대표하는 선종 사찰로 조선 후기까지 주1을 이어 오다 20세기에 들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진관 석초(眞觀釋超, 912964)와 혜월(慧月)이 이 절에 머무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펼쳐 큰 절의 면모를 유지했다. 이때가 절의 전성기로 승려가 약 300여 명에 이르렀고 물방앗간이 12개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시대 19세기까지 산음을 대표하는 선종 사찰이었다. 조선 후기 남명 조식(南冥曺植, 15011572) 등이 이 근방에서 활동하면서 지곡사에서 강론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20세기가 되어 일제에 의해서 실시된 조선총독부의 전국 사찰 등록시 지곡사의 주2인 심적암(深寂庵)이 심적사(深寂寺)로 등재되어 있고 지곡사란 이름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어떤 이유에서인가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義天, 1055~1101) 등이 편찬한 『석원사림(釋苑詞林)』 권 191에 고려 초기 문신 왕융(王融)주4 「고려국 강주 지곡사 진관선사비(高麗國康州智谷寺眞觀禪師碑)」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1 경상도 산음현 조에 의하면 지곡사에는 고려 예부상서 손몽주(孫夢周)가 지은 혜월과 진관의 비가 있었다고 한다. 두 기록의 주3 정보에 차이가 있는데 왕융은 진관선사비의 찬자이며 손몽주는 혜월비의 찬자이다. 두 비는 조선 후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절터에는 귀부만 2기가 남아있다. 이들 귀부는 혜월과 석초 비의 것으로 추정된다.

절 주변으로 석비 2기가 더 있다. 1기의 석비는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의 비로 1836년(헌종 2)에 건립한 것이며 또 다른 1기의 석비는 한암대사(寒巖大師)의 비로 1845년(헌종 11)에 건립한 것이다.

발굴 주6 결과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 전 · 후기 주5가 모두 확인되며 지곡사의 실체를 확인케 하는 지곡사명(智谷寺銘) 주7가 출토되었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세 칸 규모인 금당지에서는 불상 대좌와 소조불상편(塑造佛像片)이 노출되었다. 금당지는 조사 구역의 북동편에 자리하며 해발 200m 정도의 비교적 가파른 산야의 남동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유구가 확인되고 있는 범위는 대체로 길이 70m, 너비 약 5m로 길게 조성된 평지인데, 이곳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1m에 가까운 대형 암석을 수직상으로 쌓아 만든 높이 3.5m 규모의 거대한 축대가 동서 방향으로 직선을 이루며 약 50여m 정도 길게 이어진 상태이다. 따라서 금당과 관련이 있는 유구의 흔적은 축대의 상부에서 모두 확인되고 있다.

축대 위에 설치된 금당지 이외에 모두 5기의 주8가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는데,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주9을 비롯한 고려, 조선시대의 와전류 및 자기류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의 출토 양상과 가람 주10 등을 종합하여 볼 때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지곡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유구의 중복 양상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유물이 시간적 단절없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고, 그 중에는 연호간지 등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주14 기와가 다수 있어 지곡사가 조선 후기까지 개보수를 거치며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태사명(國泰寺銘) 기와도 출토되어 이 절이 한때 국태사로 불렸음도 확인된다. 홍유의 「유산음지곡사기(遊山陰智谷寺記)」에도 국태사 혹은 지곡사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 지곡사에는 주11, 주12, 대웅전, 약사전, 극락전, 주13 등이 있고 암자로 심적암, 적조암, 나한암, 태자암, 서운암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절은 20세기 초 폐사된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 후 19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지곡사지의 일부가 침수되었다.

산청 지곡사지(山淸智谷寺址)는 2000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산청 심적사 추파당대사 부도 및 석비산청 심적사 한암대사 부도 및 석비는 2003년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소속은 심적사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국 강주 지곡사 진관선사비(高麗國康州智谷寺眞觀禪師碑)」
『범우고(梵宇攷)』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추파집(秋波集)』

단행본

이지관, 『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高麗篇 2 ((사)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산청 지곡사지』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3)

논문

남동신, 「智谷寺 眞觀禪師碑」 (『대동금석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
남동신, 「國泰寺 應眞大師碑」 (『대동금석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
양혜원, 「智谷寺 眞觀禪師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중앙도서관·박물관 소장 탁본 자료에 대한 종합적 검토(Ⅰ)』, 서울대학교, 2011)
엄기표, 「山淸 智谷寺址의 龜趺와 石造浮屠」 (『문화사학』 17, 2002)
이두영, 「지곡사 진관선사비 탁본 소고」 (『도서관보』 126, 2003)
허흥식, 「智谷寺 眞觀禪師碑」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주석
주1

‘불법’을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

큰 절에 딸린 작은 절. 우리말샘

주3

책이나 글 따위를 지은 사람. 우리말샘

주4

책이나 글을 짓다. 우리말샘

주5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6

우리말샘

주7

처마 끝에 놓는 수막새와 암막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8

어떤 건물이 있던 터. 우리말샘

주9

깨어진 기와 조각. 우리말샘

주10

절의 가람을 일정한 자리에 알맞게 위치하여 둠. 우리말샘

주11

절의 입구에 있는, 사천왕을 모신 문. 불법을 지키고 밖에서 오는 사마(邪魔)를 막으려고 세운다. 우리말샘

주12

절에 들어가는 입구에 양쪽으로 금강신을 세워 놓은 문. 우리말샘

주13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 우리말샘

주14

쇠붙이와 돌, 살림살이에 쓰는 그릇 따위에 새겨 놓은 글. 우리말샘

집필자
양혜원(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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