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지곡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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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지곡사지
산청 지곡사지
불교
유적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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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
개설

통일신라 때 지어진 사찰로 고려시대 번성하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강연회를 여는 등 절의 명맥이 19세기까지 이어졌다. 20세기에 들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통일신라 때 창건되고 고려시대에는 진관 석초(911~964)와 혜월이 이 절에 머무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펼쳐 큰 절의 면모를 유지했다. 이때가 절의 전성기로 승려가 약 300여명에 이르렀고 물방앗간이 12개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시대 남명 조식 등이 이곳에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19세기 중반까지 명맥을 이어 왔다. 20세기가 되어 일제에 의해서 실시된 조선총독부의 전국사찰등록시 지곡사의 말사인 심적암(深寂庵)이 심적사(深寂寺)로 등재되어 있고 지곡사란 이름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경에 어떤 이유에서인가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이 절에는 1016년(현종 7) 고려 예부상서에 임명된 손몽주가 지은 혜월과 석초의 비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귀부 2기가 있다. 이들 귀부는 혜월과 석초의 비를 세울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이 절에는 석비 2기가 있다. 1기의 석비는 한암대사의 비로 1845년(헌종 11)에 건립한 것이며 또 다른 1기의 석비는 추파당 석파대사의 비로 1836년(헌종 2)에 건립한 것이다.

발굴조사결과 지곡사의 실체를 확인케 하는 「지곡사(智谷寺)명 막새가 출토되었으며, 정면과 측면이 모두 세 칸 규모인 금당지에서는 불상대좌와 소조불상편(塑造佛像片)이 노출되었다.

금당지는 조사구역의 북동편에 자리하며 해발 200m 정도의 비교적 가파른 산야의 남동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유구가 확인되고 있는 범위는 대체로 길이 70m, 너비 약 5m로 길게 조성된 평지인데, 이곳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1m에 가까운 대형 암석을 수직상으로 쌓아 만든 높이 3.5m 규모의 거대한 축대가 동서방향으로 직선을 이루며 약 50여m 정도 길게 이어진 상태이다. 따라서 금당과 관련이 있는 유구의 흔적은 축대의 상부에서 모두 확인되고 있다.

축대 위에 설치된 금당지 이외에 모두 5기의 건물지가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는데,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와편을 비롯한 고려, 조선시대의 와전류 및 자기류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뮬의 출토양상과 가람배치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 응진(應眞)에 의해 ‘국태사(國泰寺)’로 창건되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적으나,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지곡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유구의 중복양상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유물이 시간적 단절없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고, 그 중에는 연호 및 간지 등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기와가 다수 있어 지곡사가 조선후기까지 개보수를 거치며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산청지곡사지』(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03)
『한국불교사찰사전』(이정, 불교시대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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