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산 백련사 ( )

불교
유적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무염국사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萬德山)에 창건한 사찰.
이칭
이칭
만덕사(萬德寺)
유적/건물
건립 시기
통일신라
소재지
전남 강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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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백련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요세(了世)는 지눌과 송광사에 머물다가, 천태종의 묘의를 얻고 1211년(희종 7) 백련사를 크게 중창하여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사결사를 맺는데, 이 결사는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후 백련사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를 배출하였다. 또한,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조계종의 성장과 함께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으로서 불교중흥을 위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무염국사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萬德山)에 창건한 사찰.
건립경위

백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주1이다. 백련사에 대한 주2은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정약용(丁若鏞)의 『만덕사지(萬德寺誌)』 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백련사는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주3 중요한 수도 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희종 7) 요세(了世)가 크게 주4 뒤부터이다.

요세는 천태종(天台宗) 계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다.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 최홍(崔弘), 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주5 80칸을 짓게 하였다. 이 공사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시행되어,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주6이 지극한 정성으로 주7를 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주8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 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는 강진 지방이 3차례 왜구 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형태와 특징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파의 세력을 키우고 있을 때, 백련사는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의 중흥을 위한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어 이 절 주위에 성을 쌓았다.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주9로는 대웅전 · 시왕전(十王殿) · 나한전(羅漢殿) · 만경루(萬景樓) · 칠성각 ·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각 추녀마다 4개의 주10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2개의 주두(柱頭)주11로 장식한 주12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주13 있다. 또한 만경루는 규모가 큰 누각으로 강진만 일대의 바다를 환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밖의 사중유적(寺中遺蹟)으로는 만덕산 백련사 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이 있다. 1681년(숙종 7) 세워진 백련사 사적비는 2004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 비는 고려시대 한림학사 최자(崔滋, 11881260)가 쓴 원묘국사비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 주14이 훼손되고 주15만 남게 되어 정확히 알 수 없다. 이후 조선 후기 홍문관 수찬 조종저(趙宗箸, 16311690)가 편찬한 백련사 사적을 새겨 비신을 만들고 원래 귀부 위에 다시 세웠다. 중진탑은 주16주17인 위에 연화문(蓮花文)주18이 있으며, 상대석에도 무늬가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고복형(鼓腹形)의 주19에는 2줄의 주렴문이 조각되어 있고, 주20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주21에는 주22 · 주23 · 주24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 숲과 정약용이 주25 때 강진으로 주26을 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주27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 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

참고문헌

원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만덕사지(萬德寺誌)』

단행본

권상로 편,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한국의 명산대찰』 (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논문

엄기표, 「강진 백련사의 석조미술과 원묘국사의 부도와 탑비」 (『호남문화연구』 60,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6)
주수완, 「백련사 사적비 귀부의 미술사적 의의」 (『강좌미술사』 48, 한국미술사연구소, 2017)
주석
주1

불교의 한 종파의 우두머리인 큰절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 또는 큰절에서 갈라져 나온 절. 우리말샘

주2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 우리말샘

주3

건물이나 조직체 따위를 처음으로 세우거나 만들다. 우리말샘

주4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짓다. 우리말샘

주5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우리말샘

주6

조선 시대에, 관찰사의 밑에서 지방의 목(牧)을 다스리던 정삼품 외직 문관. 병권(兵權)도 함께 가졌다. 우리말샘

주7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풂. 우리말샘

주8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단체를 조직함. 또는 그렇게 조직된 단체. 우리말샘

주9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0

무엇을 받치거나 버티는 데에 쓰는 굽은 기둥. 우리말샘

주11

용의 머리. 우리말샘

주12

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공포(栱包)를 짜 올린 집. ⇒규범 표기는 ‘다폿집’이다. 우리말샘

주13

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이 받들어져 모셔지다. 우리말샘

주14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우리말샘

주15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碑石)의 받침돌. 신라 초기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탑골 공원의 대원각사 터의 비(碑)와 경주 서악의 무열왕릉의 비가 있다. 우리말샘

주16

네모반듯한 모양. 우리말샘

주17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주18

상대석과 하대석 사이에 있다는 뜻으로, ‘간석’을 달리 이르는 말. 석등(石燈)의 화사석에 받치는 대석이다. 우리말샘

주19

석탑의 지붕돌과 탑신(塔身)을 연결하는 굄돌. 우리말샘

주20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 우리말샘

주21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는 불탑의 꼭대기 부분. 우리말샘

주22

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 보통 이 위에 복발(覆鉢)이나 보륜(寶輪)을 올린다. 우리말샘

주23

탑의 노반(露盤) 위에 주발을 엎어 놓은 것처럼 만든 장식. 우리말샘

주24

위가 뾰족하고 좌우 양쪽과 위에 불꽃 모양의 장식을 단 구슬. 우리말샘

주25

조선 순조 원년(1801)인 신유년에 있었던 가톨릭교 박해 사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전교하던 이승훈(李承薰)을 비롯하여 이가환, 정약종, 권철신, 홍교만(洪敎萬) 등의 남인(南人)에 속한 신자와 중국인 신부 주문모 등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 왕후(貞純王后)를 배경으로 하는 벽파가 시파와 남인을 탄압하려는 술책에서 나왔다. 우리말샘

주26

고려ㆍ조선 시대에, 죄인을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한 기간 동안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던 형벌. 초기에는 방축향리의 뜻으로 쓰다가 후세에 와서는 도배(徒配), 유배(流配), 정배(定配)의 뜻으로 쓰게 되었다. 우리말샘

주27

소나무와 잣나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집필자
양혜원(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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