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취숙(聚叔), 호는 간재(艮齋)·남악(南岳).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조중려(趙重呂)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신경진(申景珍)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성균관에 입학, 문명을 날렸으며, 그 곳 유생들을 대표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등의 상소문을 찬(撰)하였다.
1667년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중국인 95명을 청나라에 압송하는 문제로 조정에서 논의가 일자 압송을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1669년 동몽교관이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향, 1672년 다시 복직하였다가 그해 겨울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 뒤 성균관전적에 승진하고, 이어 병조좌랑·시강원사서 등을 거쳐 문학 겸 지제교에 승진하였으며,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을 지낸 뒤, 1675년(숙종 1)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그해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서인이 실각하자 면직되었다.
1677년 성균관사예에 임명되고, 이어 헌납이 되었으나 벼슬을 사직, 1680년 종부시정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사성 등을 거쳐 1686년 회양부사가 되어 때마침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의 구휼(救恤)에 힘쓰는 등 치적을 쌓았다. 1689년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는 등 조정에서 포상이 내려졌으나, 이이·성혼이 문묘에서 출향(黜享)되자 병을 핑계로 등청하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나 장유(張維)·이식(李植)에 비유되었다. 또한, 역사에 밝았고, 천문·역수·의약에도 통달하였다. 저서로 『남악집(南岳集)』·『간재신사(艮齋新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