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사상 ()

백지묵서묘법연화경
백지묵서묘법연화경
불교
개념
중국 수나라 승려 지의가 『법화경』을 근본경전으로 삼아 완성시킨 불교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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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천태사상은 중국 수나라 승려 지의가 『법화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아 완성시킨 불교 교리이다. 천태사상은 인도의 용수에서 비롯되어 북제의 혜문, 남악혜사를 거쳐 지의에 이르러 확립되었다. 『법화경』은 제법실상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제는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니라 공(空)으로서 존재이고, 또한 연(緣)에 의해 가(假)로 존재하며, 공이나 가의 어느 일면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사려분별을 초월한 절대존재로서의 중(中)을 말한다. 이는 3제가 원융한 곳에 그 자체의 진실성이 있다는 삼제원융(三諦圓融) 사상이다.

정의
중국 수나라 승려 지의가 『법화경』을 근본경전으로 삼아 완성시킨 불교교리.
개설

천태사상은 인도의 용수(龍樹)에서 비롯된다고 하며, 북제의 혜문(慧文), 남악혜사(南岳慧思, 515-577)를 거쳐 수(隋)의 지의(智顗, 538-597)에 이르러 확립된 것이다. 지의가 지은 『법화현의(法華玄義)』 · 『법화문구(法華文句)』 · 『마하지관(摩訶止觀)』의 3대부(三大部)가 교의강요서(敎義綱要書)로 중요시되고 있다.

천태교학의 특색은 실상론(實相論)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법화경』에서 역설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법이란 현실의 세계에서 여러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일체의 것을 가리키며, 실상이란 진실의 모습, 존재의 진실재(眞實在)를 가리킨다.

즉, 모든 현실의 존재에는 그 근저에 진실성이 있고, 바로 현실 속에 이상이 있다고 하는 현실의 절대적 긍정의 입장에 서 있으며, 그 실상의 진리를 나타내는 세 가지 면으로서 삼제원융(三諦圓融)이 역설되고 있다. 삼제는 공(空) · 가(假) · 중(中)의 세 가지 진리이다.

모든 것은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공으로서의 존재이고, 또한 연(緣)에 의해 가(假)로 존재하는 가적(假的)인 것이며, 더욱이 공이나 가의 어느 일면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사려분별을 초월한 절대존재로서의 중(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일체가 3제의 면을 가지고 있으며, 더욱이 3제가 원융한 곳에 그 자체의 진실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존재의 진실성을 우주적으로 확대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우주관이 성립된다. 우주는 하나의 통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주의 삼천법(三千法)도 모두 일념(一念)에 갖추어져 있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교설로 표현되며, 그 사상을 관법(觀法)으로서 실천하는 길이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 해설되어 있다.

즉, 일체의 존재로서의 삼천과 삼제의 진리를 현실상의 미혹일념(迷惑一念)의 마음 위에서 관찰하며, 그 미혹이 일념 속에 삼천을 갖추고, 즉공즉가즉중(卽空卽假卽中)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이 관법이다. 이처럼 천태교학에서는 이론[敎]과 실천[觀]의 두 가지가 서로 어울려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고, 참다운 불교에는 이 교관이문(敎觀二門)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독자적인 교학을 확립하였다.

중국의 천태사상

천태대사 지의에 의하여 시작된 천태사상은 지의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하여 수 · 당 · 송 · 원대까지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지의의 스승 혜사는 인도 중관학파(中觀學派)의 시조인 용수의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사상을 기초로 삼았으며, 『법화경』의 중요성을 일찍이 파악하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체득하여 지의가 천태교학을 확립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지의는 대소산(大蘇山)에서 혜사의 제자가 되어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진리를 탐구하여 7년 만에 이 경의 깊은 뜻을 체득하였다. 이때 그는 지식의 측면에서 불교를 이해함에 그치지 않고 선정(禪定)을 비롯한 실천으로 전개시킬 수 있는 학풍을 익혔다.

그 뒤 천태산에 들어가서 『유마경(維摩經)』 등의 경전을 연구하고, 선법(禪法)의 연구와 실천에 전념하면서 이론적인 교학체계(敎學體系)와 실천수행법인 관심(觀心)의 체계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때 제자들에게 강의한 것이 『법화문구』 · 『법화현의』 · 『마하지관』이며, 이 책들은 제자 관정(灌頂, 561-632)이 기록하여 찬술함으로써 천태사상의 3대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지의는 천태교학을 『법화경』에 중심을 두고 전개시켰다. 즉 『법화경』의 원시론적 철학체계인 교상문(敎相門)과 이 경의 실천방법을 제시하는 관심문(觀心門)의 2문으로 나누었고, 교상문은 『법화경』의 해설서인 『법화현의』와 『법화문구』에서, 관심문은 『마하지관』에서 천명하고 있다. 교상문의 교학체계는 흔히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상판석(敎相判釋)으로 해석하며, 관심문은 선(禪)을 실천하는 관법(觀法)을 핵심으로 삼는다.

이 중 관법은 공 · 가 · 중 삼제가 본질적으로 하나임[一體]을 관(觀)하는 데 있다. 즉 삼제원융의 사상을 우리 인간의 한 생각[一念] 속에서 체득하는 관법이므로 이를 삼관사상(三觀思想)이라고도 한다. 이 진리를 체득하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서 지의는 사종삼매(四種三昧) · 이십오방편(二十五方便) · 십승관법(十乘觀法) 등을 천명하고 있다.

이 천태사상을 독자적으로 발휘한 것은 지의가 입적한 지 100년이 지나 나타난 중국 천태종 제6조 담연(湛然, 711-782) 때부터이다. 담연은 교상 · 관심의 2문을 모두 『기신론(起信論)』의 연기론(緣起論)에 입각하여 부각시켰다. 지의는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선을 비판하였지만, 담연은 선종이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져서 알력이 심하였던 때에 북종인 신회(神會, 684-758)의 선법에 영향을 받아, 천태지관은 원돈지관(圓頓止觀)이며 점오선(漸悟禪)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또 한 생각 속에 삼천세계를 관한다는 관심의 원리는 『화엄경』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화엄사상을 포용하였다. 원래 지의 당대에는 중국에 여러 종파가 확립되지 않았으나 담연 때에 이르러서는 천태종이 다른 종파와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담연은 『법화경』이 다른 대승경전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진리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법화경』은 화법과 화의의 8교를 초월한 것[法華超八]이라는 사상을 오시팔교의 교상판석에 의해 확립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중국불교는 당나라 말의 오대(五代)의 전란까지는 선종의 활동만이 두드러졌을 뿐 다른 종파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천태종은 교학에 관계된 책까지 거의 소실되는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 천태종이 부흥된 것은 고려의 고승 제관(諦觀, ?-970)이 963년에 천태교학에 관련된 서적을 가지고 가서 유포한 송나라 때부터이다.

그 뒤 천태교학 연구는 성황을 이루었다. 정광의적(淨光義寂, 919-987)을 중심으로 고려의 의통(義通, 927-988)과 지종(智宗, 930-1018)이 입문하였으며, 의적의 수제자가 된 의통의 문하에서 지례(知禮, 960-1028) · 준식(遵式, 963-1028) 등이 배출되어 정통파인 산가파(山家派)를 이루었고, 이에 대응하여 비정통인 산외파(山外派)가 나타나게 되었다.

산가파는 실상론(實相論), 산외파는 유심론(唯心論)을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시켜 갔고, 관심에 있어서는 산가파는 망심(妄心)을, 산외파는 진심(眞心)을 주장하였다. ‘모든 현상의 진실한 모습[諸法實相]’을 주장한 산가파의 대표적인 학자는 지례이며,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임(諸法唯心)’을 주장하는 산외파의 대표적인 학자는 지원(智圓, 976-1022)이다.

그러나 지례 이후 남송 때의 천태종은 선종과 정토종의 사상과 밀접하게 교유하게 되었다. 당시에 가장 성행하였던 선종에 접근한 것은 천태계에서도 특히 지례 문하의 3파 중 범진(梵臻)의 계열이다. 특히 종간(從諫, 1034?-1109)의 문인들이 대혜(大慧, 1089-1163) 등의 선사들과 깊이 교유하면서 천태의 철학을 선의 실천으로 실증하려고 노력하였다.

한국의 천태사상

고구려의 천태사상

이 땅에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가 고구려이므로, 천태사상의 근본 경전인 『법화경』이 일찍부터 전래되었으리라고는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연대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구마라이 406년에 『묘법연화경』을 번역하였으므로, 광개토왕 이후에는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 천태사상의 수용을 뒷받침하는 고승으로는 혜자(惠慈)와 파야(波若, 561-613)가 있다. 595년(영양왕 6)에 일본으로 건너간 혜자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2-621)의 스승이 되어서 태자에게 『열반경』을 비롯하여 『법화경』의 권실이지(權實二智)의 뜻을 깨우치게 하였으며, 『법화경소(法華經疏)』를 짓기도 하였다.

또 파야는 일찍이 진나라로 들어가서 학업을 닦다가 596년에 천태산 지의를 찾아가서 천태지관법을 전수받은 뒤, 천태산의 최고봉인 화정(華頂)에서 묘행(妙行)을 닦고 입적하였다는 신이한 행적을 남기고 있다. 두 고승이 천명한 천태사상은 알 수 없지만 이들을 통하여 고구려에 『법화경』 또는 천태사상이 수용된 흔적만을 살필 수 있다.

백제의 천태사상

백제의 『법화경』 전래 및 천태사상의 선양에 대한 기록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위덕왕 때의 현광(玄光)과 무왕 때의 혜현(惠現, 573-630)이 법화신앙의 실천가였음을 살필 수 있다. 웅주사람이었던 현광은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천태종 제2조 혜사의 밑에서 법화삼매를 증득하고 귀국하여, 웅주의 옹산(翁山)에 절을 짓고 중생교화에 힘썼다.

그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법을 이은 제자 1명, 화광삼매(火光三昧)를 이룬 제자 1명, 수광삼매(水光三昧)를 이룬 제자 2명 등이었다고 하며, 그의 영정은 중국 남악(南岳)의 영당과 천태산 조사당(祖師堂)에 각각 봉안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왕 때의 혜현은 오로지 『법화경』 독송을 업(業)으로 삼아 법화삼매를 얻고 많은 이적을 보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백제에는 일찍부터 『법화경』이 전래되어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고, 법화삼매를 주로 하는 실천적인 신행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천태사상

신라 역시 『법화경』의 전래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비교적 일찍부터 『법화경』을 강송한 사실은 전한다. 영축산(靈鷲山)의 혁목암(赫木庵)에 살았던 낭지(朗智)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527년(법흥왕 14)부터 이곳에 머물면서 『법화경』을 강송하였으며, 그로 인한 신통력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원효(元曉, 617-686)는 그에게 『법화경』을 배웠고 뒤에 그의 권유에 따라서 『법화경종요』를 지었다고 한다.

또 신라의 귀족이었던 연광(緣光)은 일찍이 출가하여 중국으로 가서 지의의 제자가 되었고, 몇년 뒤 홀연히 대오(大悟)하였다. 스승의 인가를 받아 『법화경』을 강설하는 한편 천태별원(天台別院)에서 묘관(妙觀)을 닦고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에도 항상 『법화경』을 강설하여 널리 홍포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김과의(金果毅)의 아들로 태어나서 일찍이 출가하였던 한 사미는 전생에 『법화경』 제2권의 한 글자를 불에 태운 뒤 18세의 나이로 죽어 환생하였는데, 금생에서도 언제나 제2권에 이르러서는 한 글자를 잊어버리곤 하였다. 어느날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전생의 일을 알려주었으므로 전생의 부모를 찾아가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이는 『법화경』의 지송공덕에 의한 환생과 그 영험을 보인 것이다.

통일신라의 천태사상

ⓛ 천태사상의 연구: 삼국통일 전의 시기가 『법화경』 신행(信行)의 시기였다면, 통일 뒤에는 『법화경』의 연구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천태사상에 관한 저술들이 많았다. 신라 최고의 고승 원효는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1권을 비롯하여 『법화경방편문요간(法華經方便門料簡)』 1권, 『법화경요로(法華經要路)』 1권, 『법화약술(法華略述)』 1권을 남겼다.

원효의 뒤를 이어 경흥(憬興)은 『법화경소(法華經疏)』 16권, 순경(順璟)은 『법화경요간』 1권, 현일(玄一)은 『법화경소』 8권, 의적(義寂)은 『법화경논술기(法華經論述記)』 3권과 『법화경강목(法華經綱目)』 1권, 『법화경요간』 1권, 『법화경험기(法華經驗記)』 3권을 남겼고, 둔륜(遁倫)은 『법화경소』 3권, 태현(太賢)『법화경고적기(法華經古迹記)』 4권, 혜운(惠雲)은 『법화경요간』 1권, 현범(玄範)은 『법화경소』 8권을 저술하였다.

이 중 현존하는 것은 원효의 『법화종요』와 의적의 『법화경논술기』 3권 중 상권뿐이지만, 이들 통일신라 전성기의 고승들이 『법화경』에 대하여 15종의 저술을 남겼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천태사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던 이 시기에 법융(法融)과 이응(理應) · 순영(純英)의 3선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천태교관을 받고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 당나라 천태종의 제8조 현랑(玄朗, 673-753)에게서 법을 얻고 730년(성덕왕 29)에 귀국하여 천태교학의 홍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원성왕 때의 고승 연회는 일찍이 영축산에 은거하면서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고 보현관행(普賢觀行)을 닦아 뜰앞 연못의 연꽃이 4계절 어느 때나 시들지 않는 이적을 보였고, 왕이 국사로 삼고자 하자 은거하다가 도중에 문수보살변재천녀의 화신을 만난 뒤 대궐로 들어가 국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하여 통일신라 때의 『법화경』 독송과 보현관행의 철저한 수도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천태학의 홍포와 관련된 몇 가지 기사가 있다. 성덕왕 때 오대산에 있었던 신앙 결사(結社) 중 서대(西臺) 미타방(彌陀房)에서는 낮에 『법화경』을 독송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또, 745년(경덕왕 4) 민장사(敏藏寺) 관음보살 전에서 기도하여 조난당했던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는 영험을 경험하였던 보개(寶開)와 장춘(長春) 모자는 그 뒤 신도들의 도움을 얻어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 한 질을 사경하였고, 해마다 3월에 도량을 개설하여 『법화경』을 강설하기도 하였다.

신라에서의 이와 같은 신앙은 당나라 등주(登州)의 적산촌(赤山村)에 있던 신라의 사찰 법화원(法華院)에까지 그대로 전파되었다. 법주(法主)인 성림화상(聖琳和尙)을 중심으로 남녀도속 250여 명이 모여서 겨울과 여름 두 차례에 걸쳐서 강설하였는데, 겨울에는 『법화경』을, 여름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의하였다. 이때의 강경 및 송경의식은 모두 신라 풍속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② 원효의 천태사상: 원효가 『법화경』을 접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낭지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법화종요』 등의 저술을 하였다. 『법화종요』의 저술연대는 원효가 죽은 해인 686년까지를 하한으로 설정한다면, 지의가 『법화현의』를 저술한 시기와는 약 80년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원효가 『열반종요』의 말미에도 지의의 교상판석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보아 지의의 천태사상을 깊이 연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법화종요』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을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의의 『법화현의』 중 별석(別釋)인 오중현의(五重玄義)와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의는 천태사상을 광범하고 번쇄한 철학체계에 의해서 천명한 데 비해, 원효는 『법화종요』를 통하여 천태사상을 간략하게 개론화하고 있다.

원효는 『법화종요』를 통하여 일체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천태사상 속으로 회통시켰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체중생은 모두가 마땅히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개당작불설(皆當作佛說)을 천명하였으며,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라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신념을 더욱 굳히고 있다.

원효는 일승(一乘)을 근본으로 삼아 『법화경종요』를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일승을 사람[人]과 법(法)으로 나누고, 사람을 일체중생으로, 법을 이(理) · 교(敎) · 인(因) · 과(果)의 4법으로 설명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중생과 부처의 간격을 좁히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될 수 없는 자리로 이끌어 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원효는 중국의 천태사상가들이 중요내용으로 삼고 있는 십여시(十如是)의 장황한 언급을 일체 취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4법과 일체중생으로 간추려 『법화경』의 논지에 조금도 이탈됨이 없이 새로운 해석방법을 천명한 것이다.

또한 중국 천태사상가들이 3승교(三乘敎)가 일승의 방편임을 설명하기 위해 세운 파삼현일(破三顯一) 등의 열 가지를 용삼위일(用三爲一) · 장삼치일(將三致一) · 회삼귀일(會三歸一) · 파삼입일(破三立一)의 넷으로 줄이고, 거의 현일(顯一) 일변도로 표현한 것을 위일 · 치일 · 귀일 · 입일 등으로 바꾸어 독자적인 논지를 펴나간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원효는 결코 천태사상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천태사상의 위에 서서 천태사상의 잘못을 시정하고 새로운 사상의 회통을 모색하는 데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원효는 천태종의 실천수행법인 지관을 조직적으로 이론화하였고 독특한 관법의 체계도 세웠다. 그가 엄장(嚴莊)에게 가르쳤다는 쟁관법(錚觀法)이 어떤 관법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가 『금광명경』을 『금고경(金鼓經)』이라 고집한 것도 쟁관법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추정된다.

원효는 좌선도 하고 ‘나무불(南無佛)’을 염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저술인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에서는 16관(十六觀)을 논하였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는 일미관행(一味觀行)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원효는 마음을 맑히는 수행법을 경전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모두 통합하고 회통시켜 갔던 것이다.

특히,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는 천태의 소지관(小止觀)의 수행방법인 스물다섯 방편 중에서 다섯 가지 인연을 갖추는 법[具五緣法]을 취하고 있다. 즉, 조용한 곳에 머무를 것, 계를 청정히 지킬 것, 옷과 음식을 갖출 것, 훌륭한 스승을 모실 것, 번거로운 일을 피할 것 등을 밝힌 뒤, 독자적인 지관법을 밝혀 진여삼매(眞如三昧)를 증득하는 데 이르기까지의 마음 닦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또 『금강삼매경론』에서는 삼매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통찰하여 하나의 경계에 머무르는 것[住一境]이며, 혼침(惛沈)도 침울(沈鬱)이 아님을 밝혀 천태의 지관과 그 맥을 같이하였고, 나아가서 정(定)의 의미를 분석하고 점차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원효는 대부분의 저술에서 “지와 관을 함께 운행한다(止觀雙運).”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으며, 삼매 · 선정 등에 대하여 깊은 해석을 가하고 있어 그가 중국의 천태사상가들에 못지 않은 뛰어난 수행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고려시대의 천태사상

ⓛ천태종 성립 이전 : 신라 말부터 시작된 선과 교의 대립은 고려 초에 이르러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사상인 천태교학에 의하여 지양, 통일되었다. 이 사상은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의 과업을 성취시키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고려가 천태사상을 꽃피운 것은 의천(義天, 1055-1101)이 천태종을 창종하고 난 뒤부터이다.

고려 초기의 천태사상가로는 제관(諦觀, ?-970)을 일인자로 꼽고 있다. 제관 이전에는 935년에 고려로 와서 천태교법을 전한 자린(子麟)의 기사 이외는 찾아볼 수 없다. 의통(義通)과 지종(智宗)이 송의 천태제12조인 의적 문하에 입문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제관은 송나라로 갔다. 중국은 오랜 전란 때문에 불교전적이 소실되자 961년(광종 12) 오월(吳越)의 왕 전숙(錢俶, 929-988)은 고려로 보물을 보내면서 불교, 특히 천태관계 서적을 기증하기를 요청해 왔으므로 광종은 제관을 파견하였다.

고려 조정은 천태전적 중에서 『지론소(智論疏)』 · 『인왕소(仁王疏)』 · 『화엄골목(華嚴骨目)』 · 『오백문론(五百門論)』 등 지의와 담연의 저술로 알려진 책 등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다. 제관은 송에 가서 의적의 문하에서 10년 동안 머무르며 천태의 교관(敎觀)을 익히다가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2권을 남겼다. 이 『천태사교의』는 담연의 천태교학을 계승하고 있으며, 교리는 오시팔교(五時八敎:부처님이 행한 5번의 설법과 8가지 교리)의 교상판석(敎相判釋:부처의 설법시기와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설명하였고, 실천문은 25가지 방편과 열 가지 관법으로 분류하여 요령 있게 체계화하고 있다.

이 『천태사교의』는 그가 가지고 간 많은 천태전적과 함께 송나라의 천태교학을 부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 책에 대한 해석을 붙인 것만도 73종에 이르렀으며, 그 주석서에 대한 말소(末疏)도 130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각(大覺)의 주석서 3권이 있다고 하지만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 이 책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천태학 입문서로서 또는 불교학 입문서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1603년(선조 36) 이래 수백 년 동안 무비판적으로 불교천태학 교과서로 학습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담연의 교학체계를 계승하고 있는 『천태사교의』보다는 천태지의의 삼대부만을 중심으로 한 교학의 재편성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가 있으나 이 견해는 천태교학의 변천배경을 무시한 의견일 뿐이다.

제관 이후에도 고려의 천태학은 덕선(德善)과 지종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러나 덕선은 이름만 보일 뿐 구체적인 활동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종은 선사이면서 중국 법안종(法眼宗)의 사상을 고려로 전하였지만 그 사상적 관심을 천태학에 두었고, 그의 불교사적 위치는 제관 이후의 고려 천태학을 계승한 데 있다. 특히, 그가 중국에서 제관을 만나 고려의 천태학을 다시 이 땅으로 가져와서 법안종이라는 이름 아래 그 명맥을 이은 것은 주목된다.

② 의천의 천태종 개립 : 천태종이 종파로 창립된 것은 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에 의해서이다. 의천은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계승하고 고려의 국기를 굳게 다지기 위하여 천태종을 세운 것이다. 천태종의 개립 목적은 선종과 교종의 통합과 대립의 지양에 있었고, 천태사상이 교학적 지해(敎學的知解)만을 주장하는 화엄종이나 실천만을 강조하는 선종을 조화롭게 통합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의천은 화엄종의 가르침과 천태가 ‘함께 크고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천태의 교의적 측면에서 본 통합관이다. 의천이 천태와 화엄을 통합하고 교종과 선종을 조화하여 통합하려고 시도한 것이 1101년(숙종 6) 천태종 개립이라는 역사적 현실로 표면화되었다.

즉, 의천은 모든 종파의 전적을 섭렵한 뒤 『법화경』 등의 회삼귀일사상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관병수(敎觀並修:교학과 수행을 병행함)를 고양하면서 화엄사상 등 모든 불교사상을 천태에다 포섭하고 역대 선구자들의 총화이념을 전수받아 융합의 종파인 천태종을 세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천이 저술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속에는 『법화경』에 관한 소(疏) 60부 229권, 지관(止觀) 등에 관한 천태관계 장소(章疏) 39부 146권이 수록되어 있다.

천태의 실천방법을 기록한 지관 관계 저서를 이 목록 속에 도입한 것은 천태의 교관일치사상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의천이 천태종을 개립하자 덕린 · 익종(翼宗) · 연사(連沙) 등이 각각 제자들을 이끌고 와서 의천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뒤 순선(順善) · 교웅(敎雄) · 유청(流淸) 등의 법손(法孫)들이 운집하여 천태교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신라 말부터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선종의 승려들이 10명 중 6, 7명이 천태종에 귀종하게 됨에 따라 천태종의 발전은 극에 달하였다. 천태종에 귀속된 사찰만도 전국에 6대 본산(本山)이 있어 교정(敎政)을 맡았었고, 법손으로는 승통(僧統) 6명을 비롯하여 160여 명의 문하인들이 배출되었다.

③ 천태종 성립 이후 : 의천 이후 약 100년이 지나 전라남도 강진의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가 천태종 중흥의 사찰로서 등장하였다. 백련사는 세칭 8국사도량이라고 하며,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가 만덕사의 옛 절을 다시 보수하여 천태종의 수도도량으로 경영한 것이다. 1211년(희종 7) 요세는 보현도량을 열어 법화삼매를 실천, 수행하였는데, 이것은 백련사가 천태종의 법화참법의 도량임을 말해준다.

이 백련사 도량에서 요세는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고 선관을 닦으며, 준제신주(准提神呪) 1,000번, 아미타불 1만 번을 염하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서원하였다. 1208년 그는 천태묘법을 체득하고 지례의 『관무량수경묘종초(觀無量壽經妙宗鈔)』를 강의하면서 대중에게 참회행을 실천하게 하였다. 요세가 닦은 백련사 실천수행방법은 12, 13세기경 남송시대의 천태사상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세가 보현도량을 결성한 것은 몽고의 난을 피해서 찾아온 유생들 몇 명을 입문시켜 『묘법연화경』을 가르쳐서 통달하게 한 1232년(고종 19) 4월이었다. 즉 법화삼매인 사종삼매(四種三昧:상행삼매 · 상좌삼매 · 반행반좌삼매 · 비행비좌삼매) 가운데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앉으나 서나 삼매를 닦음)를 닦으면서 극락왕생의 길로 이르는 법화삼매 참의(懺儀) 도량을 연 것이다.

요세를 중심으로 한 법화참법(法華懺法)의 수행은 많은 사람들을 발심시켰고, 『법화경』을 독송하기 위하여 찾아온 대중은 1,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백련사 결사운동에 참가한 도반(道伴)은 300명이었다고 한다. 이들 중에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10세기경에 본여(本如, 982-1051)가 중국의 혜원(慧遠)을 모방하며 백련사를 결사한 것과 유사한 조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직접적인 어떤 교류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또한 요세가 『천태삼대부절요(天台三大部節要)』를 지어 판각, 유포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는 의천이 천태종을 창립한 천태종의 실천인이며 가장 뚜렷한 행적을 남긴 고승으로서, 1237년(고종 24)에 입적할 때까지 『법화경』을 통해 부처가 출세한 하나의 큰 인연법[一大事因緣]의 도리를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요세의 실천은 그 뒤 우리나라 사찰의 수행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요세의 법을 이은 제자는 천인(天因, 1205-1248)이다. 백련사 제2세의 주법(主法)으로서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 혜심(慧湛, 1178-1234)과 교우를 맺고 조계선(曹溪禪)의 요령을 체득하기도 하였다. 특히 천인은 고려 최씨정권 권력자들의 깊은 귀의를 받아 백련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문집인 『정명국사후집(靜明國師後集)』에는 『법화경찬(法華經讚)』의 서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백련사에서 시행하였던 법화참법의 의례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현재 일본에서 현행되고 있는 법화참법 의례문과 동일한 것이어서 그의 것을 일본에서 그대로 채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백련사 제3세는 원완(圓晥)이라고 하나 구체적으로 활동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제4세인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의 저술에 의하여 그 당시 백련사의 사상적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과 『선문강요(禪門綱要)』, 그리고 시문집인 『호산록(湖山錄)』 4권을 저술하였다. 천책은 중국 규봉종밀(圭峰宗密)의 교선일치사상에 영향 받은 조계산 수선사 계통의 선사들과 교류하여 선을 익힌 뒤, 중국 천태종 산외파의 종의(從義)가 주창한 천태교관 사상과 선을 독창적으로 일치시켜 전개하였다.

즉 『법화경』의 본뜻을 선을 통해 통합시킨 것이다. 지의의 관심송경법(觀心誦經法)의 일심삼관사상에 의하여 “찰나의 한 생각이 하나의 큰 인연의 법과 같다.”라 하였고 ‘경의 가르침이 곧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가 모두 『법화경』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교와 선, 경(經)과 마음[心]이 하나라고 하여 교선일치의 이론을 전개시켰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의함에 있어서도 “가섭(迦葉)의 마음에 선의 등불을 붙이고 아난(阿難)의 입에 가르침의 바닷물을 부어넣는다.”고 하여 선교의 일원관(一元觀)에 서서 교학자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였다. 의천의 교관일치사상이 교의(敎義) 쪽에 서서 선사를 설득시키려는 시도였다면, 천책은 오히려 교학자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조사선(祖師禪)의 입장에 서서 천태교관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고려 불교에 있어서 천태의 교관사상이 수행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역사적 과제였음을 천책은 자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천책은 교관일치의 이론을 삼교(三敎) · 삼륜(三輪) · 삼조(三祖)로 전개시켰고, 이들 각각을 밀교(密敎) · 현교(顯敎) · 심교(心敎)의 세 범주로 나누어 해석하였다. 특히 달마의 선법을 마음의 가르침(心敎)이라고 한 것은 천책의 뛰어난 착상이다.

그의 교(敎) · 선(禪) · 밀(密)의 일원관은 실로 독창적인 불교관이다. 이와 같이 가르침인 교와 실천인 선과, 비밀의 셋을 회통(會通)하여 같은 차원에서 보려는 것은 그의 독특한 천태사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의 특색을 잘 부각시킨 것이다. 세 교를 한 가지 근원(三敎一元)으로 보는 경향은 그 뒤 우리나라 불교에 영향을 준 초종파적인 실천형태였다.

백련사의 그 뒤 법손으로서 천책의 법계(法系)에 운묵(雲默)이 있다. 제5세 원조국사(圓照國師)의 제자로서 불교뿐 아니라 주변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불교 교단사에 드물게 보는 자각의 주창자이다. 천책이 선을 ‘마음의 가르침’이라고 한 데 비하여 운묵은 ‘꽃을 들어보임(拈花示之)’ 그 자체가 ‘곧 가르침’이라고 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마음의 가르침에 대한 이론을 펴고 있다.

심교라는 어구는 천책에 의해 비롯되었으나 운묵에 이르러 구체적 논증이 성립되었으며, 그가 주교종선(主敎從禪)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조사선사(祖師禪師)를 포용하고 있는 점은 천책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그의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은 석가모니의 일대의 행적을 노래한 것으로, 내용전개는 『천태사교의』의 오시팔교의 교상판석에 근거하고 있다. 특히 보살의 수행과정에서 오품제자위(五品弟子位)를 설정한 점은 천태종의 특색을 잘 표출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혜사에 의해서 시작된 천태종의 불교사관인 정법(正法) · 상법(像法) · 말법(末法)의 세 시대의 구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을 운묵은 오시설(五時說)에 입각하여 새롭게 말법시대를 자각하고 있다.

이는 중국불교 수용과정에서 일어난 불교 법난(法難)의 역사를 일반 역사가들이 단순히 말법의 시대이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보았던 것과는 달리, 운묵은 불교의 인과응보법칙을 적용시켜 중국의 법난을 외부적 여건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불교교단과 불교인 자신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본 것으로도 뚜렷이 증명되고 있다.

고려 말의 백련사는 이미 처음의 출발 때와는 달리 귀족세력과 결탁되어 있었고, 조계종과 천태종의 사찰경영권을 둘러싼 주지의 쟁의가 송사로까지 번져가는 경우가 많았다. 천태종문에 몸담았던 운묵은 종교인 본연의 면모를 잃고 있는 당시의 승려들에게 새로운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 독특한 말법관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운묵 이후의 천태종 고승으로는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을 지은 요원(了圓)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신앙의 영험담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고려 말의 권력자 조인규(趙仁規) 가계의 사람으로서 이 조씨 가문에서 천태의 고승들이 속출하였다는 사실은 주목된다. 백련사의 제3세가 백련사의 개성 중심지로 삼았던 묘련사를 중흥한 혼기(混其)를 비롯하여, 의선(義璇) · 보해(普解) · 요원 등은 모두 조씨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은 묘련사와 수원 만의사(萬義寺)를 중심으로 하여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을 확산시켜 갔고 많은 신행결사(信行結社)를 맺기도 하였다. 고려 말 천태종의 교세는 다른 종파와 경쟁할 정도로 강력하였으므로 일반 신도 중에서 『법화경』을 이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고종의 고려대장경 재조(고종 23) 때 기고문(祈告文)을 쓴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는, 지각대사(智覺大師)로부터 지관의 뜻을 지도받고 『법화경』의 노래를 읊은 대표적인 재가 인물이다.

조선시대의 천태사상

고려 말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으로 나뉘었던 천태종은 1407년 태종의 종파 통합정책으로 다시 하나의 천태종이 되었으나, 1424년(세종 6) 세종이 선종과 교종으로 불교종파를 통폐합함으로써 천태종은 선종에 폐합되어 공식적인 종파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 천태종을 천명한 고승으로는 조구(祖丘)행호(行乎) · 기화(己和) 등을 꼽을 수 있다. 조구는 이성계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고,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도와 조선 건국에 크게 공을 세움으로써 국사가 되었으며, 자연 그의 밑에는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따르게 되었다. 행호는 왜구에 의해서 불타버린 백련사를 효령대군의 힘을 빌려 중흥하고 다시 천태종을 크게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수많은 유생들의 상소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천태학은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성행하였던 기복적인 『법화경』 신앙을 중심으로 전개되다시피 하였다. 정도전『불씨잡변(佛氏雜辨)』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던 권근(權近)은 태조가 고려 왕씨의 죽은 영혼을 위하여 금자(金字)로 『법화경』을 3부 제작할 때 서문을 썼고, 1404년에는 중형(仲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법화경』을 사경하였다고 한다.

또한 기화는 선승인 무학(無學)의 제자이면서도『법화경』의 송(頌)과 찬(讚)을 지었다. 그는 선교가 원융하다는 교의적 기초를 가지고 『법화경』을 일대교적(一代敎迹)으로 파악하였다.

기화에 이어 약 60년 후 김시습(金時習)『연경별찬(蓮經別讚)』을 저술하였다. 이때는 이미 천태종이 선종에 속하여 있었으므로 김시습은 거의 선적인 표현으로 송을 짓고 있다. 그는 천태의 교관이 선과 일치하므로 교의보다는 선을 더 강조하였고, 당시의 학자들이 지나치게 천태를 교지로만 파악하려는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법화경』의 유통에 기여한 인물은 세조이다. 세조는 1463년(세조 9) 간경도감에서 『묘법연화경』 7권을 기초로 하여 송나라 계환(戒環)의 『요해(要解)』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계환의 『법화경』은 고려 말부터 여러 가지 논의가 되었는데, 그 특징은 계환 자신이 선종 출신으로 선과 화엄에 입각하여 『법화경』을 해석하고 또 화엄과 법화를 차별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으며, 계환이 해석한 『법화경』의 유행은 새로운 천태사상의 선양에 기여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법화경』의 간행이 이루어졌다. 또한 유학자인 이이(李珥)선조에게 강의할 때 『법화경』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다른 경전에 비해 『법화경』이 많이 사용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선과 교에 능통하였던 초의선사(草衣禪師)가 특히 천태의 지관을 40년 동안이나 닦았다고 한다.

초의와 같은 시대 인물인 월창거사 김대현(金大鉉)은 지의의 초기 저술인 『선바라밀차제법문(禪波羅密次第法門)』을 구하여, 이를 요약한 『선학입문(禪學入門)』을 저술하였다. 그 당시의 천태사상은 교관사상의 특색을 유지하지 못하고 조사선의 한 지류로만 파악되고 있었으며, 조사선 또한 직관에 의한 경절문(經截門)에만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그 허점을 지적하고 보완하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하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천태지관 중 관심에 이르는 방법을 점차적으로 익히는 점차지관(漸次止觀)의 선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점차지관은 천태의 초기사상으로서 천태의 원돈지관이 직관적인 조사선에 통합됨으로써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므로 천태지관의 핵심은 원돈지관이며, 따라서 점차지관의 출현은 천태사상의 발전사적인 면에서는 무의미하다. 다만 선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선사를 계몽하기 위하여 조선시대 말엽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서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김대현 이후 우리나라에서 천태사상을 크게 부각시킨 인물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법화경』이 조선 중기 이후부터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전 가운데 하나로 채택됨에 따라 『법화경』의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져서 유일(有一)과 의첨(義沾)은 『법화화족(法華畫足)』을 남기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불교 18개 종단 중 대한불교천태종 · 한국불교법화종 · 대한불교법화종 · 대한불교일승종 · 대한불교불입종 등은 모두 천태사상을 천명하고 있는 신흥종단이다.

한국 천태사상의 특징

삼국 · 통일신라 이후에 전개된 한국천태사상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선종이 실천을, 화엄종이 지혜를 위주로 하는 데 비하여 천태종은 실천과 지혜를 동시에 중요시하고 있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이 사상은 선 · 교 통합과 대립지양의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였다.

고려 초 · 중기에는 화엄종과의 상호 보완관계에 있으면서 선종을 포용하였고, 고려 중엽 이후에는 조계산을 중심으로 한 선종과 상호작용을 가지면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사를 결성하여 법화참법을 실천하였다. 요세 · 천인 · 천책 · 무기로 이어지는 백련사의 교관일치의 전통은 정토신앙 · 밀교신앙을 잘 조화하여, 우리나라 불교의 밑바탕을 구축하여 갔다.

특히 다른 불교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말법관을 전개한 백련사의 천태교학은 불교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색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처의 마음과 말과 비밀의 가르침을 회통하여 하나로 귀일시키는 것은 신라 원효 이후의 회통사상의 전통을 낳았다.

번쇄한 철학체계보다는 개론화한 회통적인 전개가 한국천태사상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 회통사상은 단순히 『법화경』의 논리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교단의 실천형태에도 부각되어왔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고려사』
『법화경종요』
『천태사교의』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조명기, 동국문화사, 1964)
「한국천태사상의 흐름의 개관」(이영자, 『석림』 14, 1980)
『한국천태사상연구』(불교문화연구소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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