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2책. 필사본. 1307년(충렬왕 33) 이안(而安)이 판각하여 간행했으나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현재 송광사(松廣寺)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이 남아 있다.
필사본은 한장본(漢裝本)으로서 상편 가운데 1권과 하편 가운데 1권이 남아 있다. 상편의 1권은 시집으로 총 13면이고, 문집인 하편의 1권은 16면인데, 죽미기(竹迷記)와 합철되어 있다.
상편의 시집은 속인(俗人)의 제자들이 불법 가운데 의문나는 점을 시의 형식으로 질문한 데 대하여 저자가 시로 응답하여 보낸 것을 집성한 것이다.
또 하편의 문집은 제자들의 글은 수록하지 않고 산문형식으로 쓴 것인데, 소(疏)·원문(願文)·서(書) 등으로 되어 있다. 시집에 수록된 운율시는 오언율시가 3편, 칠언율시가 19편, 칠언고시가 1편으로 23편인데, 다음과 같다.
<기금장대선사 寄金藏大禪師>·<답임비서계일 答林祕書桂一>·<답한선로 答閑禪老>·<답임정언계일 答林正言桂一>·<봉답이시중장용입사시 奉答李侍中藏用入社詩>·<우답임상국계일장하 又答林相國桂一丈下>·<봉답이장용낙헌하 奉答李藏用樂軒下>·<답유평장경 答柳平章璥>·<답비서각김구 答祕書閣金坵>·<답중서사인김녹연 答中書舍人金祿延>·<답동문원평사정흥소기입사시 答同文院評事鄭興所寄入社詩>·<답낭주태수김서소기 答朗州太守金㥠疏寄>·<문공림사경서상인탄금 聞公林寺敬西上人彈琴>·<화정봉상항복천마 華頂峰上降伏天魔>·<보운조사찬 寶雲祖師贊>·<답동문원녹사정흥기운 答同文院錄事鄭興寄韻>·<답이상서영입사장구 答李尙書穎入社長句>·<찬고씨사가위사 讚顧氏捨家爲寺>·<답지제고임계일 答知制誥林桂一>·<답지제고곽여필입사 答知制誥郭汝弼入社> 등이다.
이 시들은 제자인 지방관리들이 올린 질문 시에 대한 답시이며, 제자들의 시는 다음과 같다.
<제자좌정언임계일상 弟子左正言林桂一上>·<부낙헌이장용상 附樂軒李藏用上>·<부좌습유임계일상 附左拾遺林桂一上>·<부유경 附柳璥>·<부비서각김구상 附祕書閣金坵上>·<부중서사인김녹연 附中書舍人金祿延>·<부동문원녹사정흥상 附同文院錄事鄭興上>·<부낭주태수김서상 附朗州太守金㥠上>·<부지제고사의즉이거사영상 附知制誥司議卽李居士穎上>·<부지제고곽여필상 附知制誥郭汝弼上> 등이다.
그리고 하편의 문집에는 17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금자화엄법화경경찬소 金字華嚴法華經慶讚疏>·<수륙재소 水陸齋疏>·<연경법석소 蓮經法席疏>·<위주상구병소 爲主上救病疏>·<법화인성경찬소 法華印成慶讚疏>·<신년축성 新年祝聖>·<사월팔일안거축상소 四月八日安居祝上疏>·<유사불산기 遊四佛山記>·<기최복밀온서 寄崔福密昷書>·<흥륜사대종명병서 興輪寺大鐘銘幷序>·<위산인문축청인서화엄경원문 爲山人文祝請人書華嚴經願文>·<권송미타경원문 勸誦彌陀經願文>·<청인서법화경겸지선일천원문 請人書法華經兼紙扇一千願文>·<독대장주암청전문 讀大藏住庵請田文>·<답운대아감민호서 答芸臺亞監閔昊書>·<답지휘사김공경손서 答指揮使金公景孫書>·<답영암수김낭중서서 答靈巖守金郎中㥠書> 등이다.
소에서는 전부가 글 끝에 ‘엎드려 비옵니다.’라는 뜻의 ‘복원(伏願)’이라 하여 호국안민을 기원하고 있는데, 모두 법화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17편 중에서 특히 <유사불산기>는 ≪동국여지승람≫ 권28의 상주조(尙州條)에 절록(節錄)되어 있는데,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하여 상주의 산양현 북쪽 사불산의 백련사(白蓮社) 창건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588년(진평왕 10)에 기이한 일이 생겨 창건하였고, 그 뒤에 원효(元曉)·의상(義湘) 두 성인이 관련을 맺고 있는데, 원효는 ≪법화경≫을 이곳에서 강의하였다고 한다. 1241년(고종 28) 최자(崔滋)가 상주 군수가 되어 왔다가 이곳을 찾았다고 밝히고 있으며, 진평왕 이래 600년 동안 법화도량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답운대아감민호서>에서는 보현사(普賢社)에 안거(安居) 중일 때 유생인 민호(閔昊)가 납의(臘衣)와 향촉과 편지로 문의한 데 대한 회답을 쓰고 있다. 내용은 불문(佛門)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상세히 밝히고 “법을 배워 불은(佛恩)과 황은(皇恩)에 보답하겠노라.”라고 백부에게 고하였다가 이를 제지 당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금자(金字)로 ≪법화경≫을 쓰다가 “제불세존이 오직 한 가지 큰 인연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구절을 보고 비로소 스스로 경하하면서 쉬지 않고 ≪법화경≫을 외우고 묘행(妙行)을 닦다가 동지 두 사람과 함께 한 달 이상 천리나 되는 험한 길을 걸어가 만덕산(萬德山)의 벽지에 이르렀다.
그곳 노승(老僧)이 맞이하자 거기에 머무르면서 보현도량을 처음 창립하고, 불승력(佛乘力)을 개현하려고 수행정진하였으며, 이제 14년(萬德寺誌에는 40년)에 이르렀다는 것을 밝혔다. 아울러 불교 전래의 역사를 대략 개관하고 있다.
즉, 중국에 마등(摩騰)이 불경을 처음으로 전한 뒤 낙양(洛陽)의 백마사에는 인도의 승려가 계속 왔고, 부견(符堅) 이래 송(宋)·진(晉)·양(梁)·진(陳)·수(隋)·당(唐)·후오대(後五代)·조송(趙宋)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 ≪고승전≫과 여러 전기에 보이는데, 그 동안 병화(兵火)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해동삼한(海東三韓)은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래 지금까지 862년이 되었으며, 신라의 아도(阿道)·염촉(猒觸)·낭지(朗智)·원광(圓光)·혜공(惠空)·자장(慈藏)·원효·의상 등 여러 성인이 계속 나왔고, 혜통(惠通)·명랑(明朗)이 적군을 물러가게 하였다고 하였다.
고구려 보덕(普德)은 보장왕이 오두미교(五斗米敎)에 미혹되어 삼보(三寶:부처,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제자)를 공경하지 않으며 도사를 불러들여 가람을 도관으로 만들었으므로,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제자 11인과 함께 남국으로 갔다고 하였다.
백제의 달마산에서는 혜현(惠顯)이 ≪법화경≫을 독송하고, 진표(眞表)는 성신(聖身)에 감응하여 참법(懺法)을 행하였으며, 김유신(金庾信)이 통솔하는 신라군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18전 18승하였으니 이는 불법의 영험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고려 초기의 능긍(能兢)과 도선(道詵)은 ‘삼승회일승(三乘會一乘) 삼관일심(三觀一心)’이라는 심심한 묘법(妙法)이 삼국을 통일하게 한다고 상주(上奏:임금께 아뢰는 것)하였다고 하였다.
또 선종 때의 대각국사(大覺國師)는 입송하여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는 천태종의 복(福)을 받들어 이 나라에 회삼합일(會三合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태종 형계(荊溪)의 ≪법화기≫에 이 ‘회삼’의 뜻이 잘 해석되었으니, 임금과 신하가 함께 성심껏 불법외호를 받기를 발원하여 일대사(一大事)의 영험에 의지하여 중흥해야 한다 하고 신앙 갖기를 권고하고 있다.
이 책은 1307년에 간행되었으나, 내용의 시·문들은 천책이 요세(了世) 문하에 들어간 1228년 이후에 지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책은 천책의 문인인 이안이 석교도총섭(釋敎都摠攝)이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집성하여 간행했는데, 경비는 이안이 사비로 충당하였으며, 발문은 당시의 왕사였던 천태종 승려 정오(丁午)가 지었다. 그 뒤 조선 초기 성종 때까지 유통되었다.
그것은 서거정(徐居正)이 편집한 ≪동문선≫ 권14에 ≪호산록≫ 상편의 시집 중에서 석진정(釋眞靜)의 시가 4수 수록되었고, 또 천책의 재가 제자로 당시의 고급 지방관리였던 이들의 시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뒤 조선 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이 감수하여 편찬한 ≪만덕사지≫에 이 책의 서명이 처음 수록되면서 시문을 인용하고 있다. 정약용은 천책의 ≪호산록≫을 열람하고 무척 감명을 받고 있다.
≪정다산전서≫의 <제천책국사시권 題天頙國師詩卷>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유일(有一)이 진정국사의 잃어버린 시문유집의 절반을 얻고자 무척 노력하였으나 취득하지 못하였음을 밝히고, 4권 2질 중의 2권만 보고 정약용은 천책의 문재를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이규보(李奎報)와 더불어 대명문장가로 손꼽고 있다.
“시는 짙은 아름다움이 있고, 힘이 강경하며, 산인에게 있기 쉬운 소순(蔬筍)하고 담박한 병이 없다. 학문도 해박할 뿐 아니라 사회참여에도 재능이 기민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