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

불교
문헌
인도에서 서력기원 후 1세기경 찬술되어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전래되었고, 천태종의 소의 경전이 된 대표적인 대승 경전.
이칭
약칭
법화경(法華經)
문헌/고서
편찬 시기
기원후 1세기경
간행 시기
묘법연화경 1240년(고려 고종 27)
편저자
서진 축법호(西晋 竺法護) 286년|요진 삼장법사(姚秦 三藏法師) 405-408
권책수
정법화경 10권 27품|묘법연화경 7권 28품|첨품법화경 7권 27품
권수제
정법화경(正法華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판본
육역삼존삼궐(六譯三存三闕)
표제
정법화경(正法華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묘법연화경』은 부처의 출세 본회에 입각하여 삼승 방편을 열어 일불승 진실을 밝힌 경으로, 천태종의 소의 경전이다. 인도에서 1세기경 편찬되어 동북아시아에서 성행하였다. 법화경은 축법호의 『정법화경』, 사나·굴다 공역의 『첨품법화경』, 그리고 구마라집 역 『묘법연화경』의 3본이 현전하지만, 널리 통용되는 것은 『묘법연화경』이다. 이 경은 서본·정종분·유통분을 적문·본문의 2문 6단으로 구성하였으며, 법설·비유설·숙세인연설의 삼주 설법 체계이다. 신라시대 이후 20여 종의 주석서가 찬술되었고, 170여 판본이 전한다.

정의
인도에서 서력기원 후 1세기경 찬술되어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전래되었고, 천태종의 소의 경전이 된 대표적인 대승 경전.
개설

『묘법연화경』은 ‘법화경’이라 약칭하기도 한다. 7권 28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태종(天台宗)의 근본 경전으로, 불교 전문 강원의 수의과(隨意科) 과목으로 채택되고 있다. 『화엄경(華嚴經)』과 함께 한국 불교 사상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묘법연화경』이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삿다르마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pundarika-sutra』)를 번역하여 붙인 이름이다. 『묘법연화경』은 『정법화경』, 『첨품법화경』과 함께 현전하는 법화경의 대표적 경전이다. 법화경의 산스크리트 원전은 전해지지 않는데, 이 원본을 베껴 쓴 사본이 19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발견되어 이들을 모아 산스크리트 원본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알려진 원전 사본은 네팔계본과 중앙아시아계본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네팔계본은 영국의 호드손(B. H. Hodgson, 1800∼1894)이 산스크리트 사본을 수집하던 중 법화경 원전을 발견한 것이다. 이 본은 법화경의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11세기 이후의 필사본으로 추정되며, 필체는 실담 문자(悉曇文字)와 네우리(총칭으로는 나가리) 문자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중앙아시아본은 단편적으로 전하는 것을 수집한 것이다. 여기에는 페트로프스키본과 파루하트 · 베크본 등이 있다. 11세기 이전의 필사본으로 추정하며, 직립 굽다 문자로 되어 있다. 페트로프스키본 등은 7∼8세기경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그 밖의 카슈미르의 길기트 발견본이 있는데 6∼7세기 필사본으로 추정되며, 그 내용은 네팔계에 가깝다. 서체는 중앙아시아계와 같은 직립 굽다 문자로 되어 있다. 이들 중 네팔본만이 법화경 전체를 완전하게 전할 뿐이고 나머지 본들은 일부분씩 전한다.

이상의 법화경 원전을 케른(H. Kern)과 난조(南條文雄)가 1908년부터 12년에 걸쳐 데바나가리 문자로 수집 · 교정하여 출판했다. 이것은 네팔계본에 중앙아시아계의 페트로프스키본을 더하여 교정한 것이다. 또한 1934년부터 1935년에는 와꾸하라(荻原雲來)와 쓰찌다(土田勝彌)가 케른 · 난조본에 가와구찌(河口慧海) 사본 및 티베트 역본과 한역본을 교합(校合)한 후, 로마자로 바꾸어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m』으로 간행하였다.

그 외에 다트(N. Dutt) 간본(1953), 바이다(P. L. Vaidya) 간본(1960) 등이 있다. 티베트본으로는 1924년 가와구찌(河口慧海)가 범본을 참조하여 간행한 『범장전역묘법백련화경(梵藏傳譯妙法白蓮華經)』이 있다.

중국에 전해진 범어 원전은 한역(漢譯)한 후 모두 폐기되어 정확히 어떤 원전을 번역하였는지 알 수 없다. 중국에서 한역된 법화경은 가장 오래된 경록인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부터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까지 총 여섯 역본(六譯)을 들고 있다.

① 오(吳) 지강양접(支彊梁接) 역 법화삼매경(法華三昧經) 6권(궐) ② 서진(西晋) 축법호(竺法護) 역 살타분타리경(薩藝芬陀利經) 6권(궐) ③ 동진(東晋) 지도근(支道根) 역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궐) ④ 서진(西晋) 축법호(竺法護) 역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존) ⑤ 요진(姚秦)구마라집(鳩摩羅什) 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존) ⑥ 수(隋) 사나(闍那)와 굴다(崛多) 공역 첨품법화경(添品法華經) 7권(존)

총 여섯 본 중 앞의 3본은 일실이 되어 전하지 않고, 현재 3본만이 전하므로 육역 삼존 삼궐(六譯三存三闕)이라 한다. 현존 3본 중 서진(西晋) 축법호(竺法護)가 286년 10권 27품으로 번역한 것은 『정법화경(正法華經)』이라 하였다. 요진 구마라집(鳩摩羅什)이 405년에서 408년까지 7권 28품으로 번역한 것은 『묘법연화경』이라 하였다. 601년 수(隋)의 사나굴다(闍那崛多)와 달마굴다(達磨崛多)가 범본을 교감하고 앞의 두 번역본을 비교 · 첨가하여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이라 하여 7권 27품으로 번역하였다. 구마라집 역 『묘법연화경』은 문장이 아름답고 문맥이 쉬워 예로부터 독송과 서사에 많이 사용되었고, 또한 법화경 연구의 주요 텍스트로 여겨 왔다. 특히 중국 천태 대사 천태 교학의 기본 경전으로 라집본이 채택된 이래 법화경의 대표로 여겨지게 되었다. 법화경의 주석서는 세친(世親)의 『묘법연화경우바제사(妙法蓮華經憂波提舍)』(법화경론) 2권, 천태지의(天台智顗)의 『법화문구(法華文句)』 10권 · 『법화현의(法華玄義)』 10권이 있고, 도생(道生)의 『법화경소(法華經疏)』 2권, 규기(窺基)의 『법화현찬(法華玄贊)』 10권 등이 있다.

『묘법연화경』은 부처가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의 욕망과 성품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갖가지 교법을 설하여 일불승의 진실을 밝혀서 모두 불도로 인도하는 근본 뜻을 밝힌 경이다. 이 경의 서품에 법화경을 설하기 전에 『무량의경』을 설하고 무량의처삼매에 들어 있다가 법화경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법화론』에도 법화경의 이명(異名)으로 17가지 중에 『무량의경』이 나오므로 이 경을 법화경의 개경(開經), 『묘법연화경』을 본경(本經)이라고 하였다. 또 법화경의 보현행을 확장하여 육근참회를 닦고 보살 정위에 드는 보현의 관법에 대해 밝힌 『관보현보살행법경』(일명 『보현관경』)을 결경(結經)이라 하여 법화삼부경으로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 변천

『묘법연화경』은 우리나라에서 유통된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이 『법화경』이 언제부터 유통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 조(臺山五萬眞身條)에 이 경의 이름이 보이고 있고, 의천(義天)『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이에 대한 경흥(憬興)소(疏), 태현의 고적기(古迹記), 도륜(道倫)의 소, 원효(元曉)종요(宗要)와 방편품요간(方便品料簡), 의적(義寂)의 강목(綱目), 순경(順憬)의 요간(料簡) 등 신라인의 연구 주석서가 보이고 있다. 이로써 삼국시대부터 『법화경』이 널리 유통되어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금자원(金字院) · 은자원(銀字院) 등 사경 전문 기관이 설치되어 금 · 은으로 대장경을 필사하기도 하였는데, 초기부터 『법화경』에 대한 금니(金泥) · 은니(銀泥)의 사경(寫經)도 성행하였다. 이 시대의 사경으로는 1275년(충렬왕 1)에 선린(禪隣)이 필사한 『법화경보문품( 法華經普門品)』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법화경』 간행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이 존재한다. 1020년(현종 11)에는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대반야경(大般若經)』과 함께 『법화경』을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에 김제 금산사에서 1083년에서 1097년 사이에 『법화현찬(法華玄贊)』 등을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백련사원묘국사중진탑비(白蓮寺圓妙國師中眞塔碑)에 국사가 『법화경』을 천만 번 염송한 뒤 『법화경강요(法華經綱要)』를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간행한 『법화경』의 발문에 보면 1340년 요원(了圓)이 편찬한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만의사(萬儀寺)에서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1326년 월산사 개판본 『묘법연화경삼매참법(妙法蓮華經三昧懺法)』 3권은 『묘법연화경』 28품을 12단으로 나누어 각 품별로 법화삼매를 닦도록 편찬한 획기적인 법화삼매 수행집이다. 또한 1377년 영암사 묘혜찬에서 간행한 『법화삼매참조선강의(法華三昧懺助宣講儀)』 2권은 이 수행집의 강의서로 『법화영험전』과 같은 발문으로 되어 있다. 고종 때는 고종 자신이 『법화경』을 숭상하였으며, 이규보(李奎報)가 『법화경』을 암송한 일화를 통해 법화 공덕 사상이 널리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각 국사 의천은 1097년 『묘법연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천태종을 개창하였으며, 이후 고려 말 조선 초에 걸쳐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의 2개 종파로 나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고려시대 간행본이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은 1236년 정안에 의해서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몇 종에 지나지 않지만, 『법화경』 간행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배불 숭유 정책(排佛崇儒政策)으로 사찰 경제가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불교 경전의 간행은 사찰이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계승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법화경』 간행은 경전 독송이나 교학 연구라기보다 경전 신앙(經典信仰)에 의해 시주자들의 공덕을 위하여 간행된 경향이 짙다. 고려 때의 『법화경』 유통에 대한 공덕 사상이 조선 초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금은자(金銀字)의 법화경 사경(法華經寫經)이 여러 번 이루어졌다.

세조 때는 간경도감이라는 국가 기관을 설치하여 불교 경전을 간행하였는데, 이때 『법화경』에 관한 것만 3종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판본을 살펴보면 정천익(鄭天益)시주로 1399년에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전국 각 사찰에서 간행한 기록이 뚜렷한 것만도 117종이 전해 오고 있다.

이들 판본을 살펴보면 1행에 13자, 17자, 18자, 20자가 대부분이다. 이 중에서 20자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성달생(成達生)이 필사한 1405년(태종 5) 안심사(安心寺) 간행본과 1445년(세종 27) 성달생 · 임효인(任孝仁) · 조절(曺楶) 등이 공동으로 필사하여 간행한 것, 세조 연간에 황진손(黃振孫)이 필사로 간행한 것을 번각(飜刻)한 것이 대부분이다.

내용

『묘법연화경』은 초기 대승 경전(大乘經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경이다. 이 경의 구성은 1부 7권 28품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의 3단으로 구성하여 일경 삼단(一經三段), 또는 전체를 본문과 적문으로 나누고 각각을 다시 3단으로 분류하는 2문 6단(二門六段)으로 보기도 한다.

경을 3단으로 나눴을 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단은 서분(序分)이다. 처음 「서품」인데, 본론을 열기 위한 서곡에 해당된다.

제2단은 정종분(正宗分)이라 한다. 「방편품」 제2부터 「분별공덕품」 제17의 19 게송까지로, 경의 중심 내용인 본론을 설하고 있다.

제3단은 유통분(流通分)이다. 「분별공덕품」 나머지부터 마지막 「보현권발품」 제28까지인데, 경을 널리 펴도록 당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2문 6단(二門六段)의 구성이란 본문과 적문으로 나누고 이를 삼단으로 구분한 것이다. 먼저 적문(迹門)의 처음 「서품」을 서분으로 하고, 「방편품」부터 「수학무학인기품」까지를 정종분, 그 이후 「법사품」에서 「안락행품」까지를 유통분이라 한다. 본문(本文)의 경우는 「종지용출품」의 처음부터 “너희들도 마땅히 이로 인하여 얻어 들으리라”까지를 서분으로 하고, 같은 품 “이때, 석가모니불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시되” 이후부터 「분별공덕품」의 게송 “이와 같은 사람 등은 이에 의심이 없으리라”까지를 정종분이라 한다. 이후 “또 아일다야 만일 부처님의 수명이 장원함을 듣고 그 말뜻을 알면” 이하부터 끝까지를 유통분이라 한다.

천태 대사는 『법화문구』에서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의 두 문에 입각하여 경을 해석하고 각각을 다시 세 단으로 나누어 구분했다. 두 문(二門)에 입각해 보는 것은 부처님의 의도를 본문(本門), 적문(迹門)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적문의 정종분에서는 법을 설해 보인 법설주(法說周), 비유로 풀어 보인 비설주(譬說周), 인연법을 설한 인연설주(因緣說周)의 세 부분으로 보고 이들을 다시 정설(正說), 영해(領解), 술성(述成), 수기(授記)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풀이했다.

적문과 본문이란 불보살이 본체의 깨달음의 몸〔覺身: 本地〕으로부터 중생 교화를 위해서 여러 가지 몸을 드러내는데, 본(本)은 본체 본신〔本地〕이고 적(迹)은 모습을 드러낸 분신〔垂迹〕이다. 마치 강물에 비친 달을 적문이라 한다면 강물에 드리운 하늘의 달을 본문이라 보는 것과 같다. 적문은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나 성불하신 석가불을 기조로 하여 실상의 이치를 설한 것을 말하고, 본문은 「여래수량품」에서 오백 진점겁 이전의 오랜 옛날〔久遠〕에 성불하신 석가 자신의 본체로서 본불의 일〔事〕을 나타내는 데 중점을 둔 교설을 가리킨다.

「서품」부터 「안락행품」까지의 14품은 적문(迹門)이라 한다. 이 품에는 영취산 법회에서 설법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 중에 부처님께서 직접 증득하신 제법실상의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이를 들은 중생들이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어 무량한 이익을 얻도록 설한 내용이 들어 있다. 다음 「종지용출품」부터 마지막 「보현권발품」까지의 14품은 본문인데, 본문에서는 원래 부처님이 무수겁 이전에 성불〔久遠實成〕하셨고, 중생 구원을 위해 자취를 드러낸 것이 적문의 방편신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여러 민족에게 애호되었던 이 경은 기원 전후에 신앙심이 강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에 의해 서북 인도에서 최초로 소부(小部)의 것이 만들어졌고, 2차에 걸쳐 증보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종류의 한역본 중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이 가장 널리 보급, 유통되었다. 28품으로 된 이 경은 그 전체가 귀중한 가르침으로 되어 있어서 어느 한 품만을 특별히 다룰 만큼 우열을 논하기 어렵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 관음신앙의 근거가 되어 특별히 존숭을 받아 왔고, 따로 『관음경(觀音經)』으로 편찬되어 많이 독송되었다.

이 경은 영축산에서 서품을 설한다. 특히 제11품 「견보탑품(見寶塔品)」에서는 보탑이 솟아나 부처의 설법이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증명하는데, 허공의 보탑은 보살 집단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불탑 숭배(佛塔崇拜)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다보탑과 석가탑 조성에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제15품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서는 부처가 입멸한 후 악세에 사바세계의 중생을 널리 제도할 대표 보살로 상행보살, 무변행보살, 정행보살, 안립행보살이 대지(大地)의 아래에서 솟아나게 된다. 솟아올라 허공에 머무는 것에 대해서 학자들은 오랫동안 표면에 나타나지 못하였던 보살 집단이 강력한 세력으로 출현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법화경』은 이와 같이 영축산 허공, 다시 영축산의 두 곳에서 세 번 설법한다고 한다. 허공에 머무른다는 표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입장에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전통적 교단에서 오직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불만을 숭배하는 피상적 견해를 탈피하여, 무량한 생명의 상징인 불(佛)을 보려는 보살들의 깊은 성찰의 결과를 선언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 제16품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은 영원한 생명, 근원적인 생명으로서의 부처를 체증(體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보살들의 새롭고 깊은 불타관(佛陀觀)이 반영되어 있다. 부처는 언제나 이 사바세계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교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성불(成佛)하게 한다는 지극한 이상이 담겨 있고, 이것이 우리나라 법화 신앙의 근거로 크게 작용하였다.

『묘법연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평가되는 것은 성문〔聲聞乘〕 · 연각〔緣覺乘〕 · 보살〔菩薩乘〕의 삼승(三乘)이 일불승(一佛乘)에 귀일(歸一)한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 또는 개권현실(開權顯實)이다. 곧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들의 욕망 · 성품 · 근기에 맞추어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과 보살승(菩薩乘)의 갖가지 법(法)을 설하였지만, 그것이 모두 부처의 지견을 열어 보이고 깨달음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시방불토(十方佛土)에는 오직 일불승(一佛乘)의 법만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법화경』에서 비로소 이승도 성불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승작불(二乘作佛) 내지 연인성불을 보여 주고 있다. 이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은 『화엄경』의 원융무애 사상(圓融無碍思想)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꽃을 피워 한국 불교의 전통을 회통적 귀일 불교(會通的歸一佛敎)로 이끌었고, 한민족의 화 사상(和思想)에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법화경』의 설법 체계는 모든 부처가 이와 같이 개권현실의 법을 펴서 중생을 제도하는 법설(法說)로 이루어져 있다. 이 법설에 대해서 상근기들은 이해하지만, 나머지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화택의 비유, 장자와 궁자의 비유, 약초의 비유 등 비유설(譬喩說)을 써서 중근기들은 교화하고, 하근기들을 위해서 숙세의 스승과 제자의 인연 관계를 밝혀 깨우치는 인연설(因緣說)을 폈다. 이를 삼주설법(三周說法)이라 한다.

영축산에서 삼주설법을 설한 부처님은 중생과의 인연으로 나툰 수적(垂迹)의 부처로 생멸을 보이지만, 원래 부처는 이미 구원겁 전에 성불하여〔久遠實成〕 생멸이 없다고 한다. 이는 본지(本地)의 부처로 법신불이라고도 한다. 곧 『법화경』에서는 미혹에 빠져 있는 중생을 위해 부처는 몸소 석가족으로 몸을 나투어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쿠시나가라에서 입멸에 드는 것을 보였을 뿐이며, 본래 부처님께서는 생멸이 없어 항상 모든 중생에게 불도(佛道)만을 설한다고 한다.

법화경은 법설과 인연설과 비유설을 통해서는 진실상을 설하시어 일불승의 진리를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는 법으로는 부처님이 밝힌 가르침〔경〕을 수지, 독송, 해설, 서사하라고 강조한다. 천태 대사는 이를 법화 오종 법사(法華五種法師)라고 했다. 이 수행법은 부처의 진심이 들어 있는 법화경을 의업으로 수지하고, 구업으로 독송하며, 신업으로 해설을 서사하면 우리의 삼업이 청정해져 번뇌에 쌓인 중생의 육근이 청정해지며, 더 나아가 이승의 육근, 보살의 육근, 부처의 육근이 청정해진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일불승의 믿음을 확고히 하여 선근 공덕을 쌓고 부처님께 공양하여 일불승 대력백우거(一佛乘大力白牛車)를 타고 다라니(陀羅尼) 삼매(三昧)에 들게 됨으로써 불도(佛道)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 회삼귀일 사상은 제2품 「방편품(方便品)」, 제3품 「비유품(臂喩品)」, 제4품 「신해품(信解品)」, 제5품 「약초유품(藥草喩品)」, 제7품 「화성유품(化城喩品)」 등에서 높은 문학성을 지닌 불타는 집의 비유, 장자와 궁자의 비유, 초목의 비유, 옷 속의 보배 구슬의 비유 등 법화칠유의 비유와 인연설을 통하여 잘 밝혀 주고 있다.

이는 경의 중요성과 함께 경전 간행의 영험에도 힘입은 바 크다. 현재 알려지고 있는 한국인 찬술 주석서는 신라시대 문헌부터 조선 전기까지 총 21종에 이른다.

시대 저자 책명 권수 비고
신라 원효(元曉)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1 존(存)
『법화경방편품료간(法華經方便品料簡)』 1 실(失)
『법화경요략(法華經要略)』 1 실(失)
『법화약술(法華略述)』 1 실(失)
경흥(憬興) 『법화경소(法華經疏)』 (8) 16 실(失)
순경(順璟) 『법화경료간(法華經料簡)』 1 실(失)
현일(玄一) 『법화경소(法華經疏)』(8) 10 실(失)
의적(義寂) 『법화경논술기(法華經論述記)』 3 상존(上存)
『법화경강목(法華經綱目)』 1 실(失)
『법화경료간(法華經料簡)』 1 실(失)
『법화경험기(法華經驗記)』 3 존(存)
둔륜(遁倫) 『법화경소(法華經疏)』 3 실(失)
태현(太賢) 『법화경고적기(法華經古迹記)』 4 실(失)
고려 제관(諦觀)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2 상존(上存)
의천(義天)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 3 실(失)
천책(天頙) 『해동전홍록(海東傳弘錄)』 4 실(失)
『법화수품찬(法華隨品讚)』 1 호산록(湖山錄)에 수록
요원(了圓)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상하 2 존(存)
산긍(山亘) 『묘법연화경삼매참법(妙法蓮華經三昧懺法)』상중하 3 존(存)
미상 『법화삼매참조선강의(法華三昧懺助宣講儀)』상하 2 존(存)
조선 설잠(雪岑) 『법화경별찬(法華經別讚)』 연경별찬(蓮經別讚) 1 존(存)
〈표〉 한국인 찬술 묘법연화경 주석서

판본

『묘법연화경』의 유통을 위하여 간행된 판본은 불경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수를 보이고 있는데, 현행 판본은 고려시대 10여 종, 조선시대 160여 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법화경』은 1236년에 간행된 『법화경』과 1467년(세조 13)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법화경』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송나라 계환(戒環)이 1126년(인종 4)에 저술한 『묘법연화경요해( 妙法蓮華經要解)』 7권본이다. 계환의 주해가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통된 것은 선적(禪的) 해석이 들어 있고, 그 내용이 한국 불교의 흐름과 일치하고 문장이 간결하며 이해가 쉽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존 판본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판본 3종, 조선시대 판본 117종으로, 모두 120종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법화경판은 대략 34종 3,036장이다.

법화경 판본은 고려 초부터 조선 초까지 고려본 법화경이 보인다. 영광의 불갑사 복장본은 목판본으로 고려 태조 대 간행된 것으로 보이고, 광주 자운사 후 복장본도 고려 초 간행된 것으로 송판 복각본이다. 간행 연대가 명확한 것은 정분(鄭奮)의 지(誌)가 들어 있는 기림사 목판본(보물 959-2-1호)으로 1236년 간행되었다. 이후로 1240년 강진의 백련사에서 개판한 목판본(관문사 소장본 보물 962호)은 최이(崔怡)의 발(跋)이 들어 있다. 이외에도 1286년 간행된 이건희(李健熙) 소장본(보물 693호), 1288년 간행된 강태영(姜泰永) 소장본(보물 918호) , 1370년 간행된 기림사 소장본(보물 959-2-26호)에는 곽유정(郭有楨)의 지(誌)가 있으며, 1383년 평양 백련암에서 간행된 관문사 소장본(보물 960호)은 이색(李穡)의 발(跋)이 들어 있다. 이외에도 여말 선초에 걸쳐서 간행된 것으로 기림사본(보물 959-2-12호), 봉림사본(보물 1095-5호)이 있으며, 여말 발간으로 기림사본(보물 959-2-13호)이 있다.

조선시대 판본은 원간본과 복각본, 언해본, 기타본이 있어서 다양한 분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략 여섯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성달생본계(成達生本系), 둘째 초주 갑인자본계(初鑄甲寅字本系), 셋째 을해자본계(乙亥字本系), 넷째 대자본계(大字本系), 다섯째 언해본(諺解本), 여섯째 기타본 등이다. 성달생본계는 성달생이 직접 필사한 원간본과 복각본들로 1405년 안심사본, 1422년 대자암본, 1443년 화암사본과 그 복각본들 약 51본이 있다. 초주 갑인자본은 활자본계의 원본으로 1450년 문종의 쾌유를 기원하여 갑인자로 간행한 원간본과 그 복각본들 약 43본이다. 을해자본계는 1455년 강희안체를 자본으로 대 · 중 · 소 을해자 활자로 간행한 원간본과 그 복각본들 약 5본이 있다. 대자본계는 1470년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왕실에서 대자본으로 발간한 원간본과 그 복각본들 약 41본이다. 1470년 대자선본, 1513년 귀진사본 등이 있다. 언해본은 한글 창제 후, 주로 1465년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원간본과 그 복각본, 그 외 간행된 언해본들이다. 기타본으로는 앞의 다섯 유형 외에 발간된 것들로 황진손서체계(黃振孫書體系), 성거체계(省琚體系), 서사본(書寫本), 신총대사(信聰大師), 목활자본계 등이 있다.

조선시대 판본으로 보물로 지정된 판본은 다음과 같다.

(1) 보물 제692호

1240년(고종 27)에 간행된 목판본. 2권(권7 複本) 2첩(帖). 이 판본은 권말에 의하면, 최이(崔怡)의 명으로 사일(四一)이 입수하였고 송나라 계환이 주해한 송본(宋本)에 의거하여 조판(雕板)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판각이 정교하며 자체가 단정하다. 2첩 중 간기(刊記)를 잃은 판본은 판각 당시에 인출하여 불복(佛腹)에 넣었던 듯 자획(字劃)에 마멸이 없고, 인쇄가 깨끗하며 지질도 두텁게 잘 뜬 저지(楮紙)가 흰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지정 당시의 소장자에 의하면, 황해도 황주군 정방산(正方山) 성불사(成佛寺)의 불복에서 나온 것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다른 한 첩은 성불사의 불복에서 꺼낸 판본보다 오래된 것 같이 보이나, 자획에 완결(刓缺)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쇄본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본은 『법화경』에 대한 계환의 주해본이 당시 우리나라에 널리 유통되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경기도 호암미술관과 서울의 최현이 소장하고 있다.

(2) 보물 제962호

1240년에 간행한 목판본. 2권(권7) 1책. 보물 제692호와 동일한 첩장본 판식이나 선장으로 제본하였다. 권말에 ‘시주전진양판관김○○(施主前晉陽板官金○○)’ · ‘거창군부인유씨(居昌郡夫人劉氏)’ 등의 묵서지기(墨書識記)가 있어 이들의 시주에 의하여 인출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시기는 고려 말경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이경희가 소장하고 있다.

(3) 보물 제977호

1240년에 간행한 목판본. 1권(권7) 1첩. 보물 제692호와 동일한 판본이다. 권말에 ‘시주공조전서최극수김남효도흥윤금환(施主工曹典書崔克壽金南孝道興潤金環)’의 묵서가 있어 고려 말경에 인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색(紺色) 표지에 ‘묘법연화경계환소권제칠(妙法蓮華經戒環疏卷第七)’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서울의 이원기(李元基)가 소장하고 있다.

(4) 보물 제918호

1288년(충렬왕 14) 승려 재색(齋色)이 간행한 것이다. 1권(권7) 1첩. 이 판본은 본문이 매항 16자씩 배열되어 있고, 그 윗부분에는 과주(科註)를 달아 본문과 선(線)으로 연결되게 하여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불복에서 나온 듯 앞뒤 표지가 없다. 서울의 강태영이 소장하고 있다.

(5) 보물 제960호

1382년(우왕 8)에 판각된 소자본(小字本) 『법화경』. 7권 2책. 이색(李穡)의 발문에 의하면, 계환이 주해한 구본(舊本)이 글씨가 커서 지선(志禪)이 다시 작은 글씨로 썼다고 하며, 수연군(壽延君) 왕규(王珪)와 수령옹주(壽寧翁主) 왕씨(王氏) 등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본은 권4∼7이 후쇄본이고, 권1∼3이 복각본이다. 서울의 이경희가 소장하고 있다.

(6) 보물 제1081호

권1∼3, 권4∼7. 7권 2책. 목판본. 1399년(정종 1)에 간행되었다. 권말에 있는 남재(南在)의 발문에 의하면 도인 해린(海隣)이 송나라 계환(戒環)의 주해본(註解本)을 구해서 간행하기를 원하여, 중정대부사재령치사(中正大夫司宰令致仕) 정천익(鄭天益)과 전중훈대부군기감(前中訓大夫軍器監) 이양(李穰) 등의 시주로 간행한 것이다. 권 머리에 학조(學祖)의 도장이 있어 조선 초기의 고승 학조가 소장했던 책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 소자(小字)로 아주 정교하게 새긴 판본이다. 권1의 첫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이 흠이고 다소 후쇄본(後刷本)이다. 서울의 송성문(宋成文)이 소장하고 있다.

(7) 보물 제968호

정확한 간행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1년(태종 1) 신총(信聰)이 태상왕(太上王)으로 있던 태조의 명으로 간행한 『수능엄경(首楞嚴經)』(보물 제759호)과 본문 글씨가 동일한 점과 간행 조건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도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8) 보물 제961호

1405년(태종 5) 안심사에서 간행한 것이다. 권말에 있는 권근(權近)의 발문에 의하면, 조계종 신희(信希) 등이 기로(耆老)를 위해서 보기에 편리하도록 중자(中字)로 간행하기를 원하였는데, 성달생 · 성개(成槪) 형제가 상중에 이를 듣고 선친의 추복(追福)을 위하여 필사한 것을 신문(信文)이 안심사에 가지고 가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포배장(包背裝)의 청색 명주로 된 표지가 남아 있고, 그 위에 ‘묘법연화경 권제사지칠(妙法蓮華經 卷第四之七)’이라는 제목이 주사(朱絲) 바탕에 금니(金泥)로 쓰여 있다. 서울의 이경희가 소장하고 있다.

(9) 보물 제971호

1405년 안심사에서 간행한 보물 제961호와 동일한 판본이다. 권 머리에 고려 우왕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정씨(鄭氏)라는 사람이 시주하여 새긴 커다란 변상도(21.7×79㎝)가 붙어 있다. 이 책은 원래 절첩본(折帖本)이었는데 포배장으로 개장(改裝)되어 있다. 서울의 이양재(李亮載)가 소장하고 있다.

(10) 보물 제766호

1448년(세종 30) 효령대군(孝寧大君)안평대군(安平大君)이 함께 발원하여 간행한 것이다. 권 머리에는 변상도가 있고, 권말에 안평대군이 손수 써서 새긴 발문이 있다. 이 책은 글씨를 정성껏 썼고 판각도 정교하며, 조선 초기의 명필가인 안평대군의 필적이 잘 나타나 있다. 서울의 강태영(姜泰泳)이 소장하고 있다.

(11) 보물 제936호

1482년(성종 13) 인수 대비(仁粹大妃)가 외동딸인 명숙 공주(明淑公主)의 천도를 위하여, 1470년(성종 1) 세조비인 정희 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에 의하여 판각된 목판에서 찍어낸 경전 중 하나이다. 2권 1책(複本). 책 끝에는 판각 때 쓴 김수온(金守溫)의 발문과 인출 당시 먹으로 쓴 강희맹(姜希孟)의 발문이 붙어 있다. 경기도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2) 보물 제950호

1488년(성종 19)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그의 딸 순숙 공주(順淑公主)의 천도를 위하여 찍어낸 14부 가운데 하나이다. 3권(권5∼7) 1책. 이 판본은 1470년에 정희 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에 의해서 판각된 목판에서 찍어낸 후쇄본이다. 책 끝에 1488년에 을해자(乙亥字)로 찍은 발문이 있다. 보물 제936호와 같은 판본으로 왕실 불교 신앙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3) 보물 제1010호

1463년(세조 9)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법화경』 7권 가운데 권1·3·4·5·6의 5권 5책이다. 서울의 강태영(姜泰泳)이 소장하고 있다.

(14) 보물 제1107호

1451년(문종 1) 태종의 빈(嬪)인 명빈(明嬪) 김씨가 태종 · 세종 · 소헌왕후(昭憲王后)와 친정 아버지 안정공(安靖公) 김구덕(金九德), 어머니 장경택주 신씨(莊敬宅主辛氏)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것이다. 3권(권5∼7). 서울의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5) 보물 제1140호

1463년(세조 9)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법화경』 가운데 1권(제3권) 2책으로 비록 전질은 아니나 교정인(校正印)이 있는 초쇄본(初刷本)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이 본은 계환의 주해와 일여(一如)의 집주(集註)가 붙은 『법화경』을 국역한 것인데 본문과 계환의 주해만 번역하였다. 서울의 송성문이 소장하고 있다.

(16) 보물 제1145호

이 판본은 권1〔1帖〕로 간기(刊記)가 있는 권 책을 잃었으나, 본문의 글자체로 보아 1401년(태종 1)에 신총(信聰)이 태상왕 태조의 명을 받아 필사하여 판각한 『수능엄경(首楞嚴經)』(보물 제759호)과 동일한 서법(書法)의 판본이다. 이 판본은 책의 머리〔卷首〕를 변상도로 장식한 조선 초기의 독자적인 판본인 점에서 특히 이채롭다. 경기도의 박찬수(朴贊守)가 소장하고 있다.

(17) 보물 제1147호

1470년(성종 1)에 세조비인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가 둘째 아들 예종이 돌아가자 이미 고인이 된 세조와 의경왕(懿敬王: 德宗), 그리고 예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책이다. 5권(권3∼7) 2책. 이 판본은 당시 일류 각수(刻手)인 이영산(李永山) · 장막동(張莫同) · 최금동(崔今同) 등에 의해서 판각된 것으로 그 새김이 아주 정교하다. 이 판본은 초판본으로 이후에 찍은 후쇄본이 여러 종 전하고 있다. 서울의 강태영이 소장하고 있다.

(18) 보물 제1153호

조선 세조 연간(1455∼1468)에 간행된 황진손(黃振孫)의 목판본. 3권(권1∼3) 1책. 책의 머리〔卷首〕에 변상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된 『묘법연화경』 판본 가운데 성달생이 필사한 판본 계통과 구별되는 조선시대의 독자적인 판본이다. 전주시의 한솔 종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 보물 제1164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유통된 후진(後秦) 구마라집의 한역본이다. 2권(권3∼4) 1책. 이 책은 간기(刊記)가 없으나 보물 제936호와 보물 제950호로 지정된 판본과 비교하여 보면 동일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비인 정희 대왕대비 윤씨(貞熹大王大妃尹氏)가 둘째 아들 예종이 일찍 죽자 이미 고인이 된 세조와 덕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판각한 목판에서 찍어낸 후쇄본이다. 그 후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물 제950호의 1488년(성종 19) 후쇄본보다 인쇄 상태가 양호하므로 그 이전인 성종 연간에 찍어낸 것으로 추측된다. 이 판본은 본문에 둥근 표점이 새겨져 있어 읽기 편리하게 되어 있고, 당시에 유행하던 계환의 주해가 붙어 있지 않아 독송용(讀誦用)으로 판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울의 김민영(金敏榮)이 소장하고 있다.

(20) 보물 제1194호

간기(刊記)가 없어 정확한 간행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신총이 필사하여 판각한 『능엄경』(보물 제1195호)과 서체가 동일한 판본이기에, 조선 초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엽(全葉)을 6행(行)씩 나누어 첩장(帖裝)으로 제본하였다. 1권(권3) 1첩(帖).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21) 보물 1196호

1422년(세종 4)에 성령대군(誠寧大君)과 그의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를 위하여 인순부윤(仁順府尹) 성억(成抑)이 새긴 목판을 1456년(세조 1)에 동궁(東宮: 德宗)의 빈(嬪)인 한씨(韓氏: 昭惠王后)가 친정 어머니인 홍씨(洪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찍어낸 책이다. 이 책은 7권 7책의 완질본으로 표지 일부가 약간 훼손되었을 뿐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제첨(題簽)은 붉은 바탕에 금니로 썼으며, 각 책의 권수마다 변상도가 들어 있다. 글씨는 성달생 형제가 썼다. 비록 초간본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판본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는 완질본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22) 보물 제1225호

권말(卷末)의 갑인 소자(甲寅小字)로 된 김수온의 발문에 의하면, 이 판본은 1463년(세조 9)에 간경도감에서 판각한 목판에서 인수 대비가 세조(世祖), 예종(睿宗), 의경왕과 인성대군(仁城大君)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72년(성종 3)에 찍어낸 29종의 불경 가운데 하나이다. 『법화경』이 간경도감판(刊經都監版)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귀중한 판본이다. 권 제7. 1권 1책. 목판본. 이 책은 인수 대비가 인출한 불경 가운데서도 간경도감판 『법화경』이고, 이때 인출한 60부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중앙 승가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23) 보물 제1240호

이 판본은 전 7권 중 권 제3∼4의 영본(零本)이고 간기(刊記)가 없으나 보물 제936호, 제950호와 비교해 볼 때 동일한 판본이다. 이 판본은 구두를 나타내는 둥근 표점이 새겨져 있어 독해하기 편하게 되어 있다. 제첨(題簽)에 이르기까지 책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지질이나 인쇄 상태도 매우 깨끗하다. 이 판본은 표지와 제첨이 원장(原裝) 때의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포배장인 장정은 우리나라 장정사(裝幀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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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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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http://www.cha.go.kr)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http://www.nl.go.kr/kor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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