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전기 중군총제, 평안도도관찰사,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407년에는 흥덕진병마사(興德鎭兵馬使)로서 그 곳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1410년 무과 중시에서 2등으로 급제, 다시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에 승진했으며, 그 뒤 웅무시위사첨절제사(雄武侍衛司僉節制使) · 판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에는 경성절제사로 파견되어 뛰어난 무예로써 야인 위무에 공헌하고, 다음 해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7년 전라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 1418년(세종 즉위년) 동지총제를 거쳐 내금위 삼번절제사(內禁衛三番節制使)가 되었다. 이해 9월에 상왕(上王)과 세종이 모화루(慕華樓)에서 명나라 사신을 전송할 때 성달생이 별운검총제(別雲劒摠制)가 되어 칼을 차고 시립(侍立)했다가 세종의 질책을 받고 파직되었다.
같은 해 함길도병마도절제사 겸 판길주목사로 파견되면서 복직되었으나, 곧 강상인(姜尙仁) 옥사에 연루되어 자원안치(自願安置)되었다. 그러나 곧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배려로 사면되었다.
1419년 중군총제에 서용되었고, 같은 해 대마도정벌과 관련되어 전라 · 경상 · 충청도 수군도처치사(水軍都處置使)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승선을 꺼려 무단 하륙한 일로 논죄된 뒤 연산(連山)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고 다시 좌군동지총제에 서용되었다.
1420년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뒤, 경상우도수군도절제사 · 경상우도수군도안무처치사 · 좌군총제를 거쳤다. 1422년 여연(閭延)에 침입한 야인의 격퇴를 위해 특별히 평안도도관찰사로 파견되었으며, 다음 해 관내의 기민을 구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424년에 다시 총제에 서용되었고, 다음 해에는 다시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
1427년 공조판서로 입조했다가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두 번째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 뒤 도총제 · 함길도병마도절제사 · 함길도도절제사 ·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4년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충청도 초수리(椒水里)에 행행(行幸)한 세종을 수가(隨駕)했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능숙한 무예로 북변의 진수와 시위에 공헌함이 많았고, 필법에 뛰어났다.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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