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시대, 제34대(재위: 1389~1392) 왕.
이칭
성명
왕요(王瑤)
작호
공양군(恭讓君 )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45(충목왕 1)
사망 연도
1394(태조 3)
본관
개성(開城)
출생지
개경
주요 관직
제34대 고려 국왕(1389~1392)
관련 사건
윤이(尹彝)·이초(李初) 사건|사전(私田) 개혁|조선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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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공양왕은 고려시대 제34대(재위: 1389~1392) 왕이다.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이성계 세력이 창왕을 폐위하고 왕으로 옹립했다. 재위 기간 동안 관제 개편, 유학 진흥, 사원 재산 몰수, 한양 천도 시도, 과전법 실시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 이루어졌다. 개혁의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 분쟁 속에서 고려 왕실의 존속을 주장하던 정몽주가 살해되면서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되고 공양왕은 폐위되었다.

정의
고려시대, 제34대(재위: 1389~1392) 왕.
가계 및 인적사항

재위 1389∼1392. 이름은 왕요(王瑤).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왕균(王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國大妃) 왕씨(王氏)이다. 비(妃)는 창성군(昌成君) 노진(盧稹)의 딸 순비(順妃) 노씨(盧氏)이다.

주요 활동

1389년 11월, 김저(金佇)이성계(李成桂)를 죽이고 우왕(禑王)을 복위시키고자 한 모의가 발각되어 이성계 ·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해 창왕이 폐위된 후, 왕위에 옹립되었다. 같은 달 김저가 옥에서 죽으니 문하평리(門下評理) 정지(鄭地) · 이거인(李居仁) 등 그와 공모한 27인을 유배 보냈다. 이색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변안열(邊安烈)을 영삼사사(領三司事), 심덕부를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성계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정도전(鄭道傳)을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삼았다.

12월, 간관(諫官)이 우왕과 창왕의 사형을 청하고, 우왕을 옹립한 이색(李穡) 등의 죄를 논했다. 이색 부자 및 이숭인(李崇仁) · 하윤(河崙) · 환관 이분(李芬)을 유배 보내고 우왕과 창왕을 처형하였다. 이성계 · 심덕부 · 정몽주(鄭夢周) · 지용기(池湧奇) · 설장수(偰長壽) · 성석린(成石璘) · 박위(朴葳) ·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 등 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을 포상하고 녹권(錄卷)을 하사하였다.

1390년 1월, 이성계로 하여금 8도의 군마(軍馬)를 지휘하게 하였다. 낭사(郞舍) 윤소종(尹紹宗) · 이첨(李詹) 등이 김저 사건과 관련해 변안열(邊安烈)에 대한 처벌을 청하고, 대사헌(大司憲) 성석린(成石璘)이 또 상소하여 변안열을 처형할 것을 청하여, 그를 처형하였다. 급전도감(給田都監)에서 처음으로 전적(田籍)을 나누어 주었다. 연복사(演福寺) 탑을 중수하기 위한 조성도감(造成都監)을 설치하였다.

5월, 공양왕의 즉위를 전하기 위해 명에 갔던 사신 왕방(王昉) · 조반(趙胖)이 귀국해, 명 예부(禮部)에서 자신들에게 고려인 윤이(尹彝) · 이초(李初)가 명 황제에게 호소해 공양왕과 이성계가 명을 공격하려 하는데 이색 등이 반대하니 이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냈으며, 유배된 자들이 자신들을 보내 사실을 알리게 했다고 하니, 그들이 적어 낸 명단에 있는 이색 등을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음을 전했다.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를 계기로 이성계의 반대 세력 혹은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이 대거 제거되면서 정국이 이성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9월, 공(公) · 사(私)의 전적을 불태우고, 조종(祖宗)의 제도가 자신의 대에 무너진 것에 탄식하였다. 한양(漢陽)으로 행차하며,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 하게 했으나 이듬해 2월,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1391년 1월, 이성계를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 삼았다. 5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상서해, 과전법(科田法)을 정하였다. 같은 달, 연복사 탑 수축을 중지하게 했다. 이는 4월에 성변(星變)이 발생한 데 따라 내린 구언교서(求言敎書)에 대해 신료들이 올린 상서문에 따른 것이었다. 상서문은 나아가 ‘척불(斥佛)’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후에는 그에 반대하여 다시 ‘숭불(崇佛)’을 주장하는 상소문이 이어졌다. 이러한 논쟁은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으로 권력이 이성계 세력에 집중된 상황에서 공양왕의 숭불이 태조 대의 정치를 지향하며 고려의 중흥을 표방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7월, 정몽주 등이 김저 사건, 윤이 · 이초 사건 등 5가지 사건과 관련해 그 죄의 판결을 다시 할 것을 청했다. 이에 따라 이색 등에 대한 처벌이 다시 논의되었고, 10월 이색 등의 처형을 주장하던 정도전이 폐서인되어 유배되었으며 11월, 이색과 이숭인 등을 소환하고 12월에는 이색을 한산부원군영예문춘추관사(韓山府院君領藝文春秋館事)로 임명하였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4월, 조준 · 정도전을 먼 지방으로 유배 보내고, 남은(南誾) · 윤소종(尹紹宗) · 남재(南在) · 조박(趙璞)의 관직을 삭탈해 역시 먼 지방으로 유배 보냈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이 수시중(守侍中) 정몽주를 살해하니, 다음 날 조준 등을 소환하고, 6월 조준을 경기좌우도절제사(京畿左右道節制使)로, 남은을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로 임명해 그 도의 병권을 관장하게 하였다.

7월, 왕이 이방원 등에게 명해 이성계와 동맹하는 글을 짓게 하고, 이성계의 집으로 가 동맹을 하려 했다. 배극렴(裴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의 교서를 받들어 왕을 폐위하고, 원주(原州)로 추방했다. 얼마 후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상훈과 추모

능은 고릉(高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는 것과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고려 왕실의 불안하였던 모습을 보여 준다. 조선 태종 16년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논문

김당택, 「이성계의 즉위와 공양왕」(『역사학연구』 38, 호남사학회, 2010)
안병우, 「고려 후기 농장의 발달과 사전개혁」(『한국사』 5, 한길사, 1994)
이경식, 「고려말의 사전구폐책과 과전법」(『동방학지』 4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4)
이정주, 「공양왕대의 정국동향과 척불운동의 성격」(『한국사연구』 120, 한국사연구회, 2003)
이형우, 「공양왕대 윤이·이초 사건」(『포은학연구』 18, 포은학회, 2016)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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