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법(科田法)은 고려 말 토지 제도 개혁 과정에서 제정된, 관직자들에 대한 수조지 분급을 규정한 제도이다. 고려 말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조선 건국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 초기 국가의 토지 제도 운영에서 과전법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매우 크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 초기 토지 제도의 종합적인 면모를 모두 아울러 넓은 의미의 과전법 체제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과전법은 관직자들에게 수조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라는 점에서 고려 전시과를 계승하는 면모가 있으나, 고려 말 ~ 조선 초에 걸쳐 발생한 토지 소유권과 경제 구조의 변화를 반영하고 촉진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중세사의 매우 중요한 역사적 계기로 평가받았다. 세조 대 직전법 제정과 성종 대 관수 관급제를 거치면서 국가의 토지 제도와 관료층의 경제 생활에서 의미가 크게 축소되었고 이후 특별한 제도적 계기 없이 명종 대 무렵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 전시과 체제가 무너지고 권문세가들이 겸병(兼倂) · 점탈(占奪) · 사패(賜牌) 등으로 농장(農莊)을 확대하였다. 농장의 발달에 따른 여러 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위기에 봉착하는 한편, 대토지 겸병을 통해 농장을 확대하는 권문세가에 대한 사회적 불만과 원성이 높아갔다. 고려 후기 국가는 전민변정 사업을 통해 이를 개혁하려 했으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진 이성계(李成桂) 일파는 민생 안정과 국용(國用) · 군자(軍資)의 확보를 명분으로 토지 제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조준(趙浚) 등의 상소로 시작된 토지 제도 개혁의 흐름은 이행(李行) · 황순상(黃順常) · 조인옥(趙仁沃) · 허응(許應) 등이 가세하면서 1391년(공양왕 3) 고려 토지 제도의 근간이었던 사전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과전법이 제정된 다음 해인 1392년 7월 새로운 국가 조선이 건국되었고, 고려 말에 제정된 과전법은 조선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과전법에는 토지 분급 규정, 조세 규정, 전주(田主), 전객(佃客)에 관한 규정, 토지 관리 규정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전법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 사안은 고려 말에 국가로부터 받은 토지를 개인들 사이에 사적으로 주고받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여 토지에 대한 국가 관리를 강화하는 일이었다.
과전법에 규정된 국가의 토지 분급은 크게 수조권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사전(私田)과 수조권이 공공 기관에 귀속되는 공전(公田)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전으로는 관료에게 준 과전(科田) · 공신전(功臣田) · 외관직전(外官職田), 한량관(閑良官) 등에게 준 군전(軍田), 향(鄕) · 진(津) · 역(驛)의 이(吏)에게 준 외역전(外役田)과 군장(軍匠) · 잡색(雜色)의 위전(位田) 등을 두었다. 공전으로서 군자시(軍資寺) 소속의 군자전, 왕실 소속의 능침전(陵寢田) · 창고전(倉庫田) · 궁사전(宮司田), 공공 기관 소속인 사사전(寺社田) · 신사전(神祠田) 등을 두었다.
과전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토지는 관직자들에게 지급한 과전이었다. 과전은 문무 관료에게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해 시관(時官)과 산관(散官), 즉 현직자와 퇴직자 및 대기 발령자를 막론하고 18과로 나누어 15∼150결의 전지를 분급하였다. 과전은 사전기내(私田畿內)의 원칙에 따라 경기도 안으로 한정되었다. 이와 달리 지방의 유력자인 한량관 등에게는 본전(本田)의 다소에 따라 경기 밖 외방에 군전 5결 혹은 10결이 분급되었다.
과전은 관직자 개인에 한해 지급한 것으로 사적으로 승계할 수 없었다. 과전법에서는 처음 제정 당시에 지급한 외에는 원칙적으로 추가로 과전을 지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 토지를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기존에 토지를 받았다가 자격을 상실한 사람의 토지를 직접 관에 신고하고 교체하여 받도록 하였는데, 이를 진고체수법(遞受陳告法)이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전의 체수에서 가족 내부에 우선권을 부여하였으며, 사망한 관직자의 처와 자식을 위해 마련한 수신전(守信田) · 휼양전(恤養田)과 같은 규정을 활용하여 자손들에게 과전을 세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과전법에서는 경작 농민을 전객(佃客)으로 규정하고 농민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전세 수취 규정도 마련하였다. 전객은 토지를 묵히지 않는 한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으며, 수조권을 가진 전주라도 함부로 이를 빼앗을 수 없었다. 공전 · 사전을 막론하고 농민은 논 1결에 조미(糙米) 30두, 밭 1결에 잡곡 30두를 조(租)로 납부하였으며, 전주(田主)는 국가에 논 1결마다 백미(白米) 2두, 밭 1결마다 황두(黃豆) 2두를 세(稅)로 납부하였다. 국가는 매해 농사의 작황을 현지에 나가 직접 조사하여 일정한 비율에 따라 전세 수취액을 감면해 주었는데, 이를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이라고 하였다.
과전법에 규정된 답험손실법은 공전에 대해서는 국가가 실시하지만, 사전은 전주들이 스스로 직접 조사하여 전세액을 결정하였다. 태종 대 후반에는 공전뿐만 아니라 사전에서도 국가가 일괄하여 조사하는 이른바 ‘관답험’이 추진되었는데, 전주들의 반발로 인해 시행 및 번복을 거듭한 끝에 1419년(세종 1)에 국가가 모든 토지를 직접 조사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나아가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의 실시로 전국의 모든 경작지에 똑같은 전분(田分)과 연분(年分)의 기준이 적용되면서 이러한 원칙은 더욱 확고해졌다.
1466년(세조 12) 8월부터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이 시행되어 토지 지급에서 산관이 제외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아울러 사망한 관직자의 처와 자식에게 지급되어 과전을 가족 간에 승계하는 데에 활용되었던 수신전 · 휼양전이 폐지되고 그 토지는 모두 몰수되어 직전으로 전환되었다. 이와 함께 각 관품(官品)에 대한 직전의 분급액과 지급 범위도 과전에 비하여 크게 축소되었다.
직전법에서 관료들이 퇴직 후, 사망 후의 생활 보장이 없어지자 직전세를 함부로 거두는 폐단이 늘어났다. 국가는 이에 대처해 1470년(성종 1) 직전세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 국가가 경작자에게서 직접 직전세를 거두어 해당 전주에게 지급하였던 것이다. 세조 대 직전법 제정과 성종 대 관수관급제를 거치면서 국가의 토지 제도와 관료층의 경제 생활에서 과전이 차지하는 의미가 크게 축소되었고 과전은 이후 특별한 제도적 계기 없이 명종 대 이후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과전법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를 규명하는 작업은 조선 건국을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사회 변화를 동반하는 역사 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전법의 제정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과 소유권이 중첩되는 특징을 가진 한국 중세 사회에서 수조권에 입각한 전주전객제가 약화되고 소유권에 근거한 지주전호제가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로 평가받았다. 최근에는 고려 사회의 경제적 기초인 사전을 혁파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 경제 구조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방향으로 과전법에 대한 이해가 확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