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사전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왕실 재정을 위해 지급된 토지이다. 고려 초기에는 왕실 재정을 담당한 내장택(內莊宅)과 내고(內庫) 중에서 내장택에 지급되었으며, 고려 중기 이후 내장택이 소멸되자, 고려 말에는 내고가 발달해 설치된, 이른바 창고궁사(倉庫宮司) 에도 지급되었다. 창고궁사전이 지급된 곳을 이른바 오고칠궁(五庫七宮)이라고 하였다. 창고궁사전은 사전이었으므로 전주가 직접 답험(踏驗)과 수조(收租)를 하였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면세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내수사전으로 흡수되면서 명칭이 소멸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왕실의 재정을 내장택(內莊宅), 내고(內庫)에서 담당하였다. 그 중 내장택에 공해전시(公廨田柴: 관아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지급된 경지와 산림)가 주어졌다.
고려 중기 이후 내장택에 소속된 토지는 사원(寺院), 무신에게 지급되기도 하고, 몽고 침입 등 전란에 토지가 황폐해지자 수입이 점차 감소됨에 따라 재정이 점점 궁핍해지면서 소멸되었다. 그러나 내고는 변화되면서 사전(私田)을 소유해 왕실에서 사적으로 관리하는 창고가 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는 내고가 발달해 소위 창고궁사(倉庫宮司)가 설치되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국왕과 그 족속인 왕실은 자신들의 사적인 물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 위치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당시 사전의 겸병 추세에 편승하여, 스스로 공전과 사전을 점탈해 창고궁사전은 급증하였다. 이와 같은 창고궁사전이 지급된 곳을 이른바 오고칠궁(五庫七宮)이라 하였다. 오고(五庫)는 의성고(義成庫), 덕천고(德泉庫), 내장고(內藏庫), 보화고(保和庫), 의순고(義順庫)를 가리킨다. 이들은 조선 초기까지 운영되다가 1403년(태종 3) 6월에 일괄 개편되었다. 덕천고를 파하고 내섬시(內贍寺)가 되었고, 의성고는 내자시(內資寺)를 삼았고, 내장고는 승녕부(承寧府)에 합쳤으며, 보화고는 공안부(恭安府)에 합쳤고, 의순고는 예빈시(禮賓寺)에 합쳤다. 칠궁(七宮)의 내용은 확실하지 않다.
과전법이 시행되면서도 창고궁사전은 계속 존속하면서 일정한 수조지(收租地: 조세를 수취하는 권리를 부여받은 경지)를 지급받았다. 전체 토지의 양은 알 수 없으나 태종 연간의 기록에 의하면 경기우도 창고궁사전의 합계가 1,613결이며 풍해도(豊海道: 풍천(豊川)과 해주(海州)의 지명을 따서 부른 황해도(黃海道)의 옛 명칭)에는 1만 7,345결이 산재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는 고려시대부터 면세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고궁사전은 사전이었으므로 전주가 직접 답험(踏驗: 작황의 현지 조사)과 수조(收租)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창고궁사의 노(奴)가 인마(人馬)를 많이 끌고 와서 횡렴(橫斂)이 매우 심했으므로, 조선 태조 연간에는 수조 시에 노 1구, 말 한 필로 규제하기도 하였다. 창고궁사전은 이후 내수사전으로 흡수되면서 명칭이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