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5년(충렬왕 원년)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원성공주(元成公主)로 책봉하고 계림(鷄林,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경산(京山,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을 탕목읍(湯沐邑)으로 주어 이를 원성전(元成殿)의 운영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덕천창(德泉倉)은 1314년(충선왕 원년) 4월 3일조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것은 충선왕이 제국대장공주 사후에 식읍(食邑)을 물려받고 관리하는 기관을 두어 덕천창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재원(財源)은 충렬왕이 원성공주에게 내린 식읍에서 공납으로 바친 능라(綾羅), 주포(紬布), 마포(麻布) 등과 원성전의 위전(位田)에서 수납한 미두(米豆)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 덕천고(德泉庫)는 대체로 왕이 특별한 정책을 추진하거나 행사를 개최할 때 재원을 조달했던 곳이었음이 확인된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의성창(義成倉)과 덕천고, 보흥고(寶興庫)의 베 4만 8,000필을 내어 저자에 점포[鋪]를 열게 하였으며, 1349년(충정왕 원년)에는 의성창과 덕천고에 명령하여 왕의 어머니와, 공주 및 황후의 어머니에게 음식을 올리게 하였다. 덕천고가 왕실의 사적 재정 기관이었다는 것은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사망으로 인희전(仁熙殿)에 천수도량(千手道場)을 설치했을 때, 그 비용을 덕천고에서 전담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356년(공민왕 5)과 1375년(우왕 원년)에는 덕천고로 들어오는 명주와 포를 광흥창(廣興倉)에 이관하여 백관의 녹봉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덕천창에는 사(使, 종5품), 부사(副使, 종6품), 승(丞, 종7품) 등의 관원을 두었는데, 1325년(충숙왕 12) 덕천고로 개칭하면서 모두 없앴다. 1330년(충숙왕 17) 다시 관원을 두고, 그 감독을 위해 사헌부(司憲府) 소속의 규정(糾正)에게 규찰하게 하였다. 1355년(공민왕 4) 다시 관원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고, 제거별감(提擧別監)에게 업무를 주관하게 하였다가 1388년(창왕 1)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이행(李行)의 건의에 따라 다시 사(使), 부(副), 승(丞), 주부(注簿) 등을 두었다. 이처럼 덕천고 관원의 치폐(置廢)가 잦았던 것은 이것이 왕실의 전곡(錢穀)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덕천고로 개칭된 후에도 1356년(공민왕 5) 무렵까지 여전히 덕천창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덕천고는 조선 초기까지 운영되다가 1403년(태종 3) 내섬시(內贍寺)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