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처음 호족(豪族) 연합 국가로 출발하였다. 건국 후에도 지방 호족은 여전히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반독립적(半獨立的)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 향호(鄕豪)를 고려 왕조에 편입시키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통제를 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기인제(其人制) · 사심관 제도(事審官制度)를 실시하였고, 중앙의 명령을 받아 일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금유(今有), 조장(租藏), 전운사를 파견하였다.
향호가 거두고 금유 · 조장이 수집한 조세를 중앙으로 운반했던 관리가 바로 제도전운사(諸道轉運使)였다. 건국 초창기에 고려 왕조가 지방을 통제하는 데 가장 긴요했던 것은 일반 행정 사무가 아니라 조세의 수납이었다. 918년(태조 1) 조부제(租賦制)를 정하여 실시하고, 949년(광종 즉위년) 주 · 현(州縣)의 세공액(歲貢額)을 정한 것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여기서 징수된 세공은 조창(漕倉)을 통해 개경으로 운송되었다. 따라서 외읍(外邑)에 파견된 금유, 조장 등의 사자(使者), 또는 제도전운사의 제1차적인 임무는 조부(租賦) 징수에 있었다. 전운사 앞에 제도(諸道)가 붙은 것으로 보아서 전운사는 금유 · 조장보다 더 넓은 지역에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중앙 집권적 체제는 광종(光宗) · 경종(景宗)을 거쳐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그 기반이 정비되었다. 그러다가 최승로(崔承老)의 건의에 의해 983년(성종 2) 2월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여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고, 외관(外官)을 파견함으로써 금유 · 조장이 폐지되었다.
전운사의 특징 중 하나는 지방에 파견된 외관과 함께 백성들의 재판 업무도 담당했다는 것이다. 988년(성종 7)에 내려진 판(判)에는 “여러 도의 전운사 및 외관이 백성의 고소를 듣고도 처리하지 않아 경관(京官)에게 재판을 받고 있으니, 그와 같이 단계를 뛰어넘어 재판을 하는 일이 생기면 고소한 사람과 주현(州縣)의 장리(長吏)들에게 벌을 주겠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후 지방 제도가 정비되면서 전운사는 1029년(현종 20)에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