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 3호선 ( )

고려시대사
물품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침몰선.
물품
재질
목재(소나무, 상수리나무 등)
용도
곡물, 음식 등 물자 운송용
소장처
국립해양유산연구소(현재는 마도 해역에 매장된 상태임)
제작 시기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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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마도 3호선은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침몰선이다. 이 선박은 전라남도 여수 일대에서 거둔 각종 물자를 싣고 당시 임시수도였던 강화도를 향해 운항하다가 마도 해역에서 침몰하였다. 남아 있는 배의 규모는 길이 12m, 너비 8m이며, 전체적인 구조는 밑바닥과 이물, 고물이 모두 평평한 평저선이다. 선박 내부에서는 45점의 도기, 62종의 금속 유물, 빗, 장기알 등 당대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유물이 출수되었다. 목간을 통해 볼 때 마도 3호선의 침몰 연대는 1265~1268년 사이로 추정된다.

정의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침몰선.
형태와 제작 방식

마도(馬島) 3호선은 앞서 출수된 마도 1~2호선과 유사한 평저형의 선박이다. 저판은 5단이고, 돛은 1개이며, 외판은 좌현 10단과 우현 9단이 남아 있다. 길이에 비해 폭이 넓어 평면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다. 결구 방식은 저판을 먼저 만들고, 좌우 외판을 붙였다. 이물 비우(선수)는 세로형으로 만들어 끼우고, 고물 비우(선미)는 외판에 홈을 파서 가로로 끼워 넣었다. 외판의 가로목은 이어지는 부분의 양쪽에 ‘⌌’자 모양과 ‘˩’ 모양의 턱을 만들어서 연결하였고, 위와 아래의 외판끼리는 아랫단의 윗 부분에 L자 모양의 턱을 만들어 그곳에 윗판을 얹고 나무못을 위에서 아래로 박아 고정시켰다. 마도 3호선은 지금까지 발굴한 고려시대 침몰선 중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다. 배의 주1주2 및 돛대를 고정시키는 구조 등이 완형에 가까워 선박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내용

마도 3호선에서는 화물의 발송지, 발송인, 수취인, 화물의 종류와 수량 등이 적힌 주3 15점과 주4 20점이 출수되었다. 목간 분석 결과 마도 3호선은 여수 지방에서 거둔 곡물과 먹거리를 싣고 여몽전쟁기(麗蒙戰爭期)의 임시 수도였던 강도(江都)로 향하다가 마도 해역에서 침몰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화물로는 볍씨와 보리·밤 등의 곡물과 대나무상자 안에 가득찬 생선뼈 등이 있다. 곡물과 함께 다량의 도기 항아리가 인양되었는데 그 안에는 젓갈류가 들어 있었다. 목간에는 상어[沙魚], 말린 홍합[乾淡], 전복 젓갈[鮑醢], 생전복[生鮑], 견포(犭脯) 등이 적혀 있다. 장기돌도 47점이 인양되었는데, 조약돌의 앞뒷면에 장군(將軍), 차(車), 포(包), 졸(卒) 등의 묵서가 있다. 청동 유물로는 대접, 접시, 합, 숟가락, 젓가락, 국자, 10541056년 사이에 주조된 지화통보(至和通寶) 등이 있다. 앞서 출수된 태안선과 마도 12호선보다 훨씬 많은 양의 청동용기가 발견된 셈이다. 숟가락은 9점이 출수되고, 젓가락은 4점(2쌍)만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배에 탄 사람 중 2명은 다른 뱃사람들보다는 지위가 높은 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출수된 씨앗과 대나무를 이어 만든 갓끈 장식[竹纓]도 그들이 썼던 갓 장식이었을 것이다.

목간에 적혀 있는 화물 수취인으로는 김영공(金令公)과 시랑(侍郞) 신윤화(辛允和) 및 유승제(兪承制) 등이 있다. 김영공은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아 1264년(원종 5)에는 교정별감(敎定別監)과 해양후(海陽候)에 책록된 김준(金俊)이다. 시랑 신윤화는 1260년(원종 원년)에 장군으로 몽골에 사신으로 다녀온 인물이며, 유승제는 원종 초 우부승선(右副承宣)의 직위에 있었던 유천우(兪千遇)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볼 때 마도 3호선은 강도에서 개경(開京)으로 주5 직전인 1264년에서 1268년(원종 9) 사이에 전라도 여수 일대의 곡물과 공물 등을 싣고 서남해안을 따라 강화도로 향하다가 마도 인근에서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의의 및 평가

마도 3호선에는 강도의 지배층에게 보내는 곡물과 먹거리가 실려 있었고, 여수 일대에서 거둔 전복과 같은 여러 고급 식재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배에 탄 사람들이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조약돌로 만든 장기알도 출수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식생활과 놀이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목간에는 “우삼번별초도령시랑(右三番別抄都領侍郞)”, “중방우번상(重房右番上)”, “우삼번별초본소상(右三番別抄本所上)” 등의 묵서가 있어 무신정권 당시 삼별초와 중방의 운영 실태에 관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마도 3호선은 세계제국 몽골에 저항하던 강도 시기에 무신정권의 지방통제 시스템과 조운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단행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보 2011』 (2012)

논문

임경희, 「마도 3호선 목간의 현황과 판독」 (『목간과 문자연구』 7, 한국목간학회, 2012)

기타 자료

‘800년전 고려인 참돔·넙치·전복·농게도 젓갈로 담가 먹었다’, 『동아일보』 (2012.5.9.)
‘고려시대 판도라상자 ‘마도3호’ 열렸다’, 『연합뉴스』 (2011.10.6.)
‘마도3호선 발굴성과 발표하는 성낙준 소장’, 『연합뉴스』 (2011.10.6.)
‘‘마도 3호선’ 대한민국 역사를 새로 쓰다’, 『아시아경제』 (2011.10.6.)
주석
주1

배의 앞부분. 우리말샘

주2

배의 뒷부분. 우리말샘

주3

글을 적은 나뭇조각. 종이가 없던 시대에 문서나 편지로 쓰였다. 우리말샘

주4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자를 기록하던 대나무 조각. 또는 대나무 조각을 엮어서 만든 책. 우리말샘

주5

전쟁 따위의 국난으로 인하여 정부가 한때 수도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옛 수도로 돌아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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