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신윤화(辛允和)는 최씨 무신 정권(崔氏武臣政權)에서 무신으로 입신하였는데, 삼별초(三別抄) 소속으로 보인다. 1258년(고종 45) 3월에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김준(金俊)으로 개명)과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 등이 중심이 되어 최씨 무신 정권을 붕괴시킨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였다. 무오정변은 최의 정권(崔竩政權)의 정치 · 경제적 실정에 불만을 품은 여러 정치 세력이 결집하여, 4대 집권자인 최의(崔竩)를 죽이고 왕정복고를 이룩했던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에 수록된 「상서도관첩(尙書都官貼)」에 의하면 신윤화가 무오정변에 참여할 때의 관직이 정6품의 낭장(郎將)이었고, 김준과 유경 등 주동 인물을 보좌한 공로로 1258년 7월 차송우(車松祐) 등과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 성격의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 동력보좌공신(同力輔佐功臣))에 책봉되었다. 그 이후 장군(將軍)으로 승진하였다.
1260년(원종 1) 4월에는 장군으로서 대부소경(大府少卿) 장계열(張季烈)과 함께 쿠빌라이[홀필열(忽必烈), 세조(世祖)]를 위한 축수소(祝壽疏)와 공물(貢物)을 가지고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개평부(開平府, 현 내몽고자치구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정람기(正藍旗) 동쪽)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드리자, 같은 해 3월 24일에 즉위한 쿠빌라이는 고려가 가장 먼저 하례사(賀禮使)를 보내 왔고, 또 왕의 친조(親朝)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후대하였다고 한다. 그해 8월에 귀국하였는데,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근래 태안 앞바다 마도(馬島) 해역에서 발굴된 마도3호선에서 나온 목간에 ‘신윤화시랑택상(辛允和侍郞宅上)’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서, 고려 무신 집권기에 정4품의 장군이 같은 반열의 문반직인 시랑(侍郞)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1258년 7월 위사보좌공신 19인(혹은 20인)에 포함되었고, 1260년 6월 위사보좌공신 15인에 다시 책봉되어 포상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