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정변이란 1258년(고종 45, 戊午年) 3월 유경(柳璥)·김준(金俊, 일명 金仁俊) 등이 최의(崔竩)를 죽이고 최씨무인정권을 종식시킨 사건을 말한다.
같은 해 4월 유경을 제1위로 하여 김준·박희실(朴希實)·이연소(李延紹)·박송비(朴松庇)·김승준(金承俊)·임연(林衍)·이공주(李公柱) 등 8명이 위사공신에 봉해졌다. 동시에 차송우(車松佑) 등 19명에 대한 보좌공신 책봉도 있었던 듯하다.
1258년 7월 도병마재추소(都兵馬宰樞所)의 건의로 위사공신에게 자손에 대한 음서의 특전과 토지·노비의 차등 지급이 있었고, 공신당(功臣堂)에 도형(圖形)을 벽상(壁上)할 것이 결정되었다. 또한 보좌공신에게는 한 아들을 9품직에 음보(蔭補)하는 특전이 있었다.
이로부터 1259년 5월 사이에 보좌공신 중 4명이 위사공신으로 승격해 위사공신 12명, 보좌공신 15명이 되었다. 또한, 공신 내부의 알력이 표출되면서 정변 이후 전주권(銓注權)을 독점했던 유경이 김준 등에 의해 실각, 김준이 새로운 무인집정이 되었다.
결국 1260년(원종 1) 유경이 위사공신 제1위에서 5위로 떨어지고 제2위였던 김준이 1위로 올랐다. 김준의 아들 대재(大材)·용재(用材)·식재(式材, 또는 植材) 등도 보좌공신에서 위사공신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또 변동이 있어 보좌공신 중 1명이 위사공신으로 승격, 위사공신은 모두 13명으로 되었다. 보좌공신도 1명이 추가, 15명을 유지함으로써 전체 공신 수는 무오정변 직후의 27명에서 28명으로 늘었다.
그리고 유경의 서열이 한 등급 떨어져 제6위로 되었다. 1262년 10월 미륵사에 공신당을 중창하고, 13공신의 도형을 벽상함으로써 위사공신의 명단과 서열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1565년(명종 20)에 간행된 『문화유씨세보(文化柳氏世譜)』, 세칭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에는 1262년 6월 유경에게 하사된 「상서도관첩(尙書都官貼)」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무오공신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으며, 위사공신 및 보좌공신의 명단·서열과 정변 당시의 관직을 알 수 있다. →무오정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