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정변은 1258년(고종 45) 3월 강화도에서 김준 등이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최충헌·최우·최항으로 이어진 최씨정권은 최우 말년부터 내부분열이 이어졌고 최항 때는 오랜 몽고와의 전쟁으로 세력기반이 약해졌다. 최항에 이어 집권한 최의가 김준 등을 배격하자 김준은 최의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붕괴시켰다. 김준 등의 무신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무신정권을 이어갔다. 하지만 소수의 공신을 기반으로 한 김준의 정권은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이처럼 무오정변은 무신정권의 붕괴가 시작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최씨정권은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최우(崔瑀) · 최항(崔沆) · 최의(崔竩)로 이어지면서 4대 62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최항 때부터는 정권 내부의 분열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최우 말년에는 권력의 승계를 둘러싸고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金若先)과 최항 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 곧 이어 김약선의 아들인 김미(金敉)와 주숙(周肅, 周永賚)이 잇따라 반란을 꾀함으로써 최항은 이들을 제거한 뒤에야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최우의 세력기반을 이루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제거는 결국 최씨정권의 내부분열로 인한 약화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최항의 세력기반은 최우의 기반에 비해 매우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최항 때는 몽고와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문무관료들 사이에서 몽고와 강화하자는 주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전국 각지에서 일반민들이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에 항복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 역시 강경한 주전론을 견지하면서 정권을 유지시켜오던 최씨정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었다.
1257년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정을 세습하자, 정권 내부에서 다시 한 번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최의가 집권한 뒤로 이전에 최항 아래에서 사병(私兵)을 지휘하던 최양백(崔良伯) · 이공주(李公柱) · 김준 세 사람 중에서 최양백만을 가까이함으로써 김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더욱이 다음해 정월 최의가 김준의 반대를 물리치고 대장군 송길유(宋吉儒)를 유배시키자 이 두 사람 사이의 반목이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송길유는 일찍이 김준을 최우에게 천거했던 사람이었으나, 당시 안찰사(按察使) 송언상(宋彦祥)에 의해 혹리(酷吏)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게 되었다. 김준은 대사성(大司成) 유경으로 하여금 이를 무마시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의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송길유를 유배시키고 유경과 김준을 의심해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유경과 김준은 신의군도령낭장(神義軍都領郎將) 박희실(朴希實), 지유섭낭장(指諭攝郎將) 이연소(李延紹), 장군 박송비(朴松庇), 도령낭장 임연(林衍), 섭낭장 이공주, 대정(隊正) 박천식(朴天植), 별장동정(別將同正) 차송우(車松佑), 낭장 김홍취(金洪就) 및 김준의 아들인 대재(大材) · 용재(用材) · 식재(式材) 등과 모의하고, 휘하의 신의군과 야별초(夜別抄)를 동원해 최의를 죽이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곧 편전(便殿) 옆에 정방(政房)을 설치하고 왕정(王政)을 복구했으며, 몽고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최충헌 이후 계속된 최씨정권은 붕괴되었지만 곧 바로 왕정이 복구되고 문신정치가 재개된 것은 아니었다. 정변 이후 정변을 주도했던 무신들은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김준을 중심으로 무신정권을 연장시켜갔다.
그러나 김준의 정권은 소수의 공신들을 기반으로 했으므로 이전의 최씨정권에 비해 상당히 취약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무신정권의 붕괴기라 할 수 있는 단계로 접어들었고, 무오정변은 곧 무신정권 붕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