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내급사, 장군, 사공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칭
김정(金晸), 김치(金緻)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내급사|장군|사공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 후기에, 내급사, 장군, 사공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초명은 김정(金晸) 또는 김치(金緻). 아버지는 최이(崔怡)의 사위인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약선(金若先)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최이의 사랑을 받아 내급사(內給事)에서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장군으로 고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무뢰배를 모아 일을 꾸민다는 참소를 받고 최우에 의해 삭발당하고 하동으로 유배되었다. 그 때문에 김미와 가까웠던 장군 김정휘(金正暉), 평로진부사(平虜鎭副使) 손중수(孫仲秀), 다방(茶房) 안기(安琦) 등 35명이 강에 빠트려 죽임을 당했다.

1247년(고종 34) 3월 환속하여 이름을 김미로 고치고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김미의 처가 신종의 아들인 양양공(襄陽公)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 장군 유정(劉鼎), 지유(指諭) 기홍석(奇洪碩) · 민경함(閔景咸) 등에 의해 최이의 후사로 삼으려는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결국 최이에 의해 거부되고 이들은 죽임을 당했다.

1249년 최항(崔沆)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급제(及第) 홍렬(洪烈), 춘방공자(春坊公子) 정첨(鄭瞻)을 시켜 큰아버지인 김경손(金慶孫)에게 편지를 보내 최항을 제거할 것을 상의했으나, 김경손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최이에게 이를 밀고하니, 홍렬 등은 가구옥(街衢獄: 감옥)에 갇히고, 김미는 고란도(高瀾島)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