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졸[卒伍] 출신으로 출발하였으나 고종(高宗) 때 집권자 최항(崔沆)에게 아첨하여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가 되어 죄수를 혹독하게 다스렸다. 장군을 거쳐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는데, 가계(家系)가 미천하다 하여 고신(告身: 임명장)에 서경(署經)이 거부되다가 최항의 압력으로 마침내 이루어졌다.
대장군(大將軍)으로 경상도수로방호별감(慶尙道水路防護別監)이 되어 야별초(夜別抄)를 거느리고 주(州)·현(縣)을 돌아다니면서 몽고병에 대비하여 백성들을 섬으로 피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 때 영(令)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때려죽이고, 백성들이 재물에 애착심이 있어 고향을 떠나기를 어려워할까 염려하여 그 집과 재물을 불태웠으며 토지와 재물도 빼앗았다.
1258년(고종 45) 이 사실이 안찰사(按察使) 송언상(宋彦庠)에게 적발되어 도병마사(都兵馬使)에게 보고되고 다시 집권자 최의(崔竩)에게 알려져 추자도(楸子島)에 귀양갔다. 뒤에 그 일당인 김준(金俊)이 최씨정권(崔氏政權)을 타도하고 실권을 잡자 송언상을 고소하여 해치려 하였으나, 원종(元宗)이 감싸주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으나 창병(瘡病)이 나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