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원사건은 1170년(의종 24)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이 보현원(普賢院)에서 문신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보현원은 개경 동남쪽에 있던 사찰이고, 의종이 자주 행차하여 연회를 즐긴 장소였다. 의종은 정사를 멀리하고 문신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겼던 반면, 이를 호위하던 무신들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았다. 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 등은 의종의 총애를 믿고 무신을 멸시하여 그들의 분노가 점점 쌓였다. 같은 해 8월 의종과 문신들이 보현원으로 행차하자,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왕의 측근 문신들과 환관을 대부분 살육하였다.
1170년(의종 24) 8월에도 의종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과 흥왕사(興王寺)를 거쳐 보현원으로 행차하였는데, 호위하던 대장군(大將軍) 정중부, 견룡행수(牽龍行首)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 · 이고(李高) 등은 흥왕사에서 이미 문신들을 살해하고자 모의하였다. 이때 마침 행차 도중에 기거주(起居注) 한뢰(韓賴)가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치고 모욕한 사건이 일어나 무신들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이에 정중부 등은 보현원에 도착하자마자 순검군(巡檢軍)을 움직여 승선(承宣) 임종식(林宗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복기(李復基), 기거주 한뢰(韓賴), 승선(承宣) 이세통(李世通), 내시(內侍) 이당주(李唐柱), 어사잡단(御史雜端) 김기신(金起莘), 지후(祗候) 유익겸(柳益謙), 사천감(司天監) 김자기(金子期), 태사령(太史令) 허자단(許子端) 등 시종하던 문신들과 환관들을 살해하였다. 이들의 시체는 의종이 만든 연못에 버렸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 연못을 조정침(朝廷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보현원사건을 ‘무신정변’ 혹은 ‘경인(庚寅)의 난’ 등으로 부른다. 이 사건 이후 정중부 등은 곧바로 개경으로 달려가 또다시 많은 문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이로부터 무신정권(武臣政權)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