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은 조선전기 제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398~1400년이다. 고려말에 부친 이성계와 함께 왜구의 침략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고, 조선건국 후에는 병권에 관여했다. 제1차 왕자의 난 후 세자 책봉 때 완강히 거절했으나 이방원의 양보로 세자에 책봉되고 1개월 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399년 개경으로 천도했고,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다. 사병 혁파, 정무와 군정을 분리하는 행정개혁, 노비변정도감을 설치 등의 업적이 있다. 왕위를 태종에게 선양한 후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수를 다했다.
재위 1398∼140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경(曔)이고, 초명은 방과(芳果)이다. 자는 광원(光遠)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정종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는 판예빈시사 증문하좌시중월성부원군(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행실이 단엄, 방정하면서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1377년(우왕 3) 5월 이성계(李成桂)를 수행해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1388년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서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국문하였다. 1389년(창왕 1) 7월 절제사(節制使) 유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
1390년 1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추충여절익위공신(推忠礪節翊衛功臣)에 책록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그 해 6월 자혜윤(慈惠尹)으로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寧州)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격파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 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고, 이듬 해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로 개수(改授)되는 등 병권에 관여하였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芳遠)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 책봉문제가 제기되었다. 방과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이 양보해 세자가 되었다.
1개월 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반강제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했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따라 전개되었다.
1399년(정종 1) 3월 개경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였다. 이로써 관인(官人)이 권귀(權貴)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해 권귀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1400년 2월 정안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 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門下府左散騎常侍) 김약채(金若采) 등의 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 · 정 분리체제를 이뤘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방원의 영향력 하에서 이뤄진 것이라 하겠다.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해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그 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다. 11월에는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였다. 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해 노비 변정을 기도하였다.
재위 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으로 삼았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 · 사냥 · 온천 · 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하였다.
시호는 처음에는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었으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으로 개시되었다. 묘호(廟號)는 정종(定宗)이다.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