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득휴(得休). 고려 후기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을 무너뜨리고 현달한 첨의중찬(僉議中贊) 유경(柳璥)의 후손이다.
공민왕 때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 장군 등 무관직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우왕 초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77년(우왕 3)에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와 같이 황해도 각지에 침입한 왜구를 쳐 물리치고 공을 세웠다. 1378년(우왕 4) 동북면(東北面)에 파견되어 호구(戶口)를 조사하였다. 1383년(우왕 9) 2월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겸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問使)에 임명되었다. 합포(合浦) 원수로 있을 때 왜적선 120척이 침입하매 정지(鄭地)의 응원을 받아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적선 17척을 불사르고 왜적을 몰아냈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개경의 숭인문(崇仁門) 방어전에서 최영(崔瑩)에게 패퇴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권력을 잡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간관(諫官) 허응(許應) 등이 '유만수는 문음(門蔭)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어머니에게 불효하여 사람들이 천하게 여긴다. 소윤(少尹) 최수첨(崔秀瞻)의 집 처녀를 강간하였다. 공공연히 다른 사람들의 토지를 빼앗아 많은 사람들이 원통함을 품고 있다.'라는 점을 들어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1389년(창왕 1) 절제사(節制使)가 되어 이방원(李芳遠: 조선 태종)과 함께 해주(海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궁시(弓矢)를 하사받았다. 이어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 겸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이 되었으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1390년(공양왕 2) 위화도 회군에 협력한 공신 45명 중에 포함되어 공신호(功臣號)를 받았다. 1392년 1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4월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이성계 휘하의 270여 명을 이끌고, 정몽주의 가산(家産)을 몰수하고 그 당여도 모두 다스리자고 하자 왕이 따랐다. 헌사에서 대간들의 탄핵 상소에도 불구하고 왕이 계속 유만수의 뜻을 따르는 것을 경계하자 같은 해 6월 유배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더하여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고, 1393년(태조 2) 회군공신 1등에 추록(追錄)되면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이르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참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