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고려 후기에, 지문하부사, 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하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협력하였으나, 조선 건국 이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참살당한 무신·공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388년(우왕 14)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개경의 숭인문(崇仁門) 방어전에서 최영(崔瑩)에게 패퇴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권력을 잡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간관(諫官) 허응(許應) 등이 '유만수는 문음(門蔭)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어머니에게 불효하여 사람들이 천하게 여긴다. 소윤(少尹) 최수첨(崔秀瞻)의 집 처녀를 강간하였다. 공공연히 다른 사람들의 토지를 빼앗아 많은 사람들이 원통함을 품고 있다.'라는 점을 들어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1389년(창왕 1) 절제사(節制使)가 되어 이방원(李芳遠: 조선 태종)과 함께 해주(海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궁시(弓矢)를 하사받았다. 이어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 겸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이 되었으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1390년(공양왕 2) 위화도 회군에 협력한 공신 45명 중에 포함되어 공신호(功臣號)를 받았다. 1392년 1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4월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이성계 휘하의 270여 명을 이끌고, 정몽주의 가산(家産)을 몰수하고 그 당여도 모두 다스리자고 하자 왕이 따랐다. 헌사에서 대간들의 탄핵 상소에도 불구하고 왕이 계속 유만수의 뜻을 따르는 것을 경계하자 같은 해 6월 유배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더하여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고, 1393년(태조 2) 회군공신 1등에 추록(追錄)되면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이르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참살당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고려말 정치사 연구』(홍영의, 혜안, 2005)
-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제도개혁」(김당택, 『전남사학』24, 2005)
- 「무진회군공신의 책봉전말과 그 성격」(박천식, 『전북사학』3,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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