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정권 때 합주부사(陜州副使)로 있었다. 당시 하동(河東) 감무(監務) 노성(盧成)이 그 고을 사람 이규(李珪)·이창(李昌), 남해현령(南海縣令) 정고(鄭皐), 급제 유여해(兪汝諧), 중 명취(明就) 등과 함께 최항정권의 국정을 비방하고 세태를 비판하였을 때 동참하였다. 전 학록(學錄) 정성(鄭珹)이 노성 등의 무신정권에 대한 비판을 최항에게 무고하자, 노성과 이규, 이창 등은 참수를 당하고 설인검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1270년(원종 11)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출륙환도(出陸還都)가 단행될 때 강도(江都)에서 개경으로 돌아왔다. 1271년(원종 12) 세자 왕심(王諶: 충렬왕)이 원에 입조하였을 때 수행하였다. 세자가 원나라 연경(燕京: 현 北京市)에 오래 머물러 있자 수행한 자들이 고향생각이 나서 세자에게 일본원정을 구실삼아 귀국할 것을 황제께 청원하라고 권고하였다. 이때 설인검은 김서(金㥠) 등과 함께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세자가 귀국하는 문제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후 일본원정을 빌미로 1272년(원종 13) 세자 왕심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