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벼슬을 얻기 위해 집정자의 집에 분주하게 드나들며 엽관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에도 분경의 폐단이 없지 않았으나 법으로 금지한 일은 없었다. 그 뒤 조선 초기에 행정과 군정(軍政)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 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제정되었다.
1399년(정종 1)에 일족 중 3 · 4촌내의 근친이나 각 절제사(節制使)의 대소군관(大小軍官)을 제외한 일체의 대소 관리가 서로 사알(私謁 : 사사로이 윗사람을 만나 봄)하는 것을 금하는 교지가 처음 내려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행되지 못하다가 태종이 즉위하면서 실시를 보게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제도적인 조치가 거듭되던 끝에 1470년(성종 1)에 분경의 금지 대상이 확정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이에 의하면 이조 · 병조의 제장(諸將)과 당상관, 이방 · 병방의 승지, 사헌부 · 사간원의 관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의 집에 동성 8촌 이내, 이성(異姓) · 처친(妻親) 6촌 이내, 혼인한 가문, 이웃 사람 등이 아니면서 출입하는 자는 분경자로 간주되어 100대의 곤장을 맞고 3,000리 밖으로 유배당하게 규정되어 있다.
사실 이 규정은 매우 폐쇄적인 법제여서 많은 한계가 노정되었다. 또한 후에는 관인들이 표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몰래 청탁하고 행적을 감추기 때문에 별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후 유명무실해진 법제로 남아 있다가 1688년(숙종 14)에 분경 금지 시기와 대상이 축소되어 좀더 합리적으로 되었다.
즉, 도목정(都目政) 실시일이 정해진 뒤에는 이조 · 병조의 당상관의 집에, 도목정 후 서경(署經) 전에는 사헌부 · 사간원 관리의 집에 동성 6촌 이내, 이성 4촌 이내, 혼인한 가문의 사람이 아니면서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같은 내용이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에 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