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익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성, 부제학,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우(仲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1년(경종 1)
사망 연도
1781년(정조 5)
본관
광산(光山)
주요 관직
도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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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성, 부제학,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우(仲祐). 증조가 대사간 김만채(金萬埰)이고, 할아버지는 김진항(金鎭恒)이며, 아버지는 김성택(金聖澤)이다. 김경택(金慶澤)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음(門蔭)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1750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주1, 1759년(영조 35) 별시 문과에 을과로 주2. 왕실과 혼인한 배경으로 사헌부 · 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1763년에는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에 발탁되어 정사(正使) 조엄(趙曮)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곧 당상관에 올라 대사성 · 부제학 ·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 지평 어석령(魚錫齡)으로부터 이조참의 · 전라도관찰사 재임시의 부정과 탐학상(탐욕이 많고 포악함)을 탄핵받았으나 영조의 옹호로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 뒤 마음이 편하지 않던 중 비변사당상으로 병을 핑계로 차대(次對: 정기적으로 왕에게 정무를 아뢰는 일)에 나오지 않았다다.

이로 말미암아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 청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곧 풀려나기는 하였으나 정조 즉위년에 홍인한(洪麟漢) · 정후겸(鄭厚謙) 등의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것으로 양사(兩司)의 집요한 탄핵을 주3. 한때는 정조의 비호로 대사헌에 기용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1777년(정조 1) 지도(智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주4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주석
주1

진사 급제 : 『숭정3경오식년사마방목(崇禎三庚午式年司馬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想白古351.306-B224s-1750])

주2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十五(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3

탄핵 내용 : 『정조실록』 1권, 1776년(정조 즉위년) 7월 16일. "김상익이 자신의 원통함을 호소하여 상소하자 더 정진할 것을 비답하다"

주4

지도에 유배 : 『정조실록』 3권, 1777년(정조 1) 4월 16일. "양사의 상소에 따라 송형중을 신지도에 안치하고 김상익을 지도에 정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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