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도 ()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변상도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변상도
회화
개념
불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변상도는 불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이다. 포괄적 의미에서 변상이란 불교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사찰 벽화나 걸개 그림 등을 포함한 불교 그림 전체와 부처 관련 설화가 주류를 이루는 고대 인도의 불탑 부조까지 모두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범위가 점차 축소되어 ‘변상도’라는 단어는 ‘경전의 핵심적인 내용을 도해한 경전그림’이라는 한정적인 의미로 국한되어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주로 사경화와 판경화를 일컫는 명칭으로 통용된다.

정의
불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
내용

개념

변상(變相)의 ‘변(變)’은 원래 산스크리트어 파리나마(parināma)를 번역한 단어인 ‘전변(轉變)’에서 파생한 ‘변현(變現)’ 즉, ‘변화하여 만들어진 것을 현현(顯現)시킴’의 의미로, 불교 설화나 경전의 내용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을 의미한다. 변(變)은 변화, 변경의 의미도 있지만 비정상적이거나 혹은 기이하고 비약적인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빅터 메이어는 불교의 도입 이후 중국에서 '변(變)'이라는 단어가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을 일컫는 '신변(神變)'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신변, 변현의 의미를 내포하는 ‘변’을 그린 ‘변상’, 즉 ‘~변’의 유형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8세기 이전에 '변'과 '변상'이란 단어는 그림 뿐만 아니라 입체적인 소상이나 부조와 같은 조각품, 서적의 삽도, 두루마리 그림, 벽화 등 많은 장르의 예술형식에 사용되었으나, 주1시기부터 회화에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회화 중에서도 주로 복잡한 경전그림에 사용하였고 불 부처, 보살 등의 단독상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실제로 불화(佛畵)의 기원에 대한 전거로 인용되는 의정(義淨, 635713)이 번역한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雜事)』에도 ‘대신통변’, ‘지옥변’ 등의 그림을 주2에 그리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장언원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도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사찰들에 ‘유마힐본행변’, ‘항마변’, ‘지옥변’, ‘서방정토변’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의 벽화들이 그려졌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선도(善導, 617681)는 정토변상 300여 벽화를 그렸고, 주3의 화가 범경(范瓊)은 성수사(聖壽寺) 등 사찰 이백여 칸에 다양한 주제의 벽화를 그리는 등 당대(唐代)에는 변상이 없는 사원이 없었다는 기록 등도 다량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당대(唐代)의 기록들로, 이 시기 ‘변’ 또는 ‘변상’이라는 명칭은 구별없이 혼용되었으며, 주로 경전의 내용이나 항마변, 지옥변 등과 같은 기적적이거나 드라마틱한 불교적 설화나 서사와 관련된 그림들에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변상이라는 단어가 ‘불교설화나 경전의 내용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로서 사용된 과정을 살펴볼 때 함께 주로 논의되는 문제로 주4주5이 있다. 주6의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된 다양한 강창류(講唱類) 사본들은 9~10세기[당말(唐末)~오대(五代)] 불교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 글들이다. 20세기 초 중국의 학자 정진탁(鄭振鐸)은 이 글들을 불교 경전을 이해하기 쉽게 일부 변형한 글들이라는 의미로서 ‘변문(變文)’이라 명명하였다. 이러한 강창류 사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지어 살펴보면, 당말(唐末)의 사찰들은 규모는 물론 사회적 비중도 커지며 세력화되었고, 그 결과 점차 세속화되었다. 전통적으로 사원에서는 포교를 위한 대중 강연과 경전을 강의하는 강경(講經)의식이 이루어졌다. 이 중 속인들을 위한 강경, 즉 속강(俗講)에서는 경전의 내용을 보다 쉽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점차 통속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부연하기도 하였고, 속강과 함께 가무, 희극, 잡기 등과 같은 갖가지 오락 활동이 행해졌다. 속인을 상대로 하는 속강은 원래 주7이라는 특성상 매 공연마다 내용이 동일하지 않고 유동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종의 대본이라 할 수 있는 기록, 이른바 변문들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관련 연구자들은 속강을 포함한 강경에서 전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림[變相]이 활용되었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변문이 변상의 대본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사례로서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의 『항마변상도권[降魔變相畵卷, P.4524]』이다. 이 두루마리 그림은 기원정사 설립을 둘러싼 사리불과 외도(外道) 노도차(牢度叉)의 투쟁설화인 「항마변문」을 텍스트로 하여 그린 것으로, 이는 『현우경(賢愚經)』 「수달기정사품(須達起精舍品)」에 몇 가지 내용을 첨가하여 변문화한 것이다. 이 도권에는 사리불과 노도차의 투쟁에 관한 에피소드 6종이 그려져 있으며, 그림은 두루마리가 펴지는 방향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야기의 서사적 전개에 따라 순차적으로 나열되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구연은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이야기꾼[講說者]이 앞에서 산문으로 기록된 내용을 이야기한 후, 노래꾼[唱者]이 뒤이어 운문으로 된 노래를 부르면서 해당 부분의 변상을 펼쳐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두루마리의 그림의 뒷면에 각 장면에 상응하는 내용이 운문(韻文)이 쓰여져 있다는 점 또한 이 경권이 속강을 위한 대본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경전의 내용과 관련 변상이 병렬식으로 배치된 『부모은중경』『목련경』 등이 이와 같은 속강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대표적인 경전변상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대에 이르면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971983]의 조판 등 기록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으며, 여기에 진종(眞宗, 9971022)이 내린 ‘속강금지령’으로 인하여 불교에서 속강의 문화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변상은 경전변이나 불전도, 설법도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변상 본래의 의미에서 볼 때 변문과 속강과의 결속력이 약화되면서 효용이 축소되었으며, 변상도의 양상도 변모하게 되었다. 즉 송대(宋代) 이후 사찰에 그려지는 사원 벽화는 설화적인 내용의 ‘불전변상’은 점차 축소되고 '설법 장면'의 비중이 증가하다가 원대(元代)에 이르러서는 변상도에서 설법 장면이 분화되기에 이른다. 명대(明代) 이후 사찰의 전각에서 주예배의 대상은 불화가 아닌 조각상이 되었고, 다양한 주제의 변상도들은 점차 사라져 일부 사찰에 그려진 불전벽화 정도가 그 명맥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사례는 현존하는 전각들이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에 건축된 것이라 중국의 사례처럼 전체적인 추이를 살펴볼 수는 없다. 다만 현전하는 고려불화 중에서는 미륵하생경변상도, 관경서분변상도관경십육관변상도와 같이 경전의 내용을 상세하게 시각화한 전각용 변상도가 남아 있으며, 조선에서도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 같은 석가의 일대기를 다룬 팔상도, 불교적 설화의 이야기를 도해한 안락국태자경변상도, 경전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화엄경변상도나 염불왕생첩경도와 같은 다양한 전각용 변상도들이 비록 그 수량이나 비중이 크지는 않을지라도 꾸준하게 제작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앞서 언급한 조선시대 불화들 중 상당수의 도상이 경전변상도의 판화로부터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사찰의 예배화이자 장엄화로서의 변상도의 효용은 중국과 한국에서 각각의 특징이 나타나지만, 경전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의 변상의 본질적 역할은 수많은 경전들에 담긴 경전 그림들을 통해 중국은 물론 고려와 조선까지 그 명맥이 꾸준히 이어졌다.

경전변상도

경전변상도의 체제는 크게 경전의 첫머리에 변상이 자리하는 권수화(卷首畵), 본문의 해당 부분에 변상이 삽입되는 삽화(揷畵), 본문과 경전이 상하[上圖下文式] 혹은 앞뒤[前文後圖式]로 배치되는 병렬화(竝列畵)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대다수는 경전의 가장 처음에 변상도가 배치되는 권수화이다. 권수화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화엄경법화경변상도처럼 한 화면 안에 설법장면과 경전 내용의 도해가 공존하는 형식과 조선시대에 간행된 대부분의 경판화처럼 부처의 설법도만을 표현한 형식이 있다. 삽화식 경전변상으로는 『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불설대목련경』, 『묘법연화경』 「보문품」 등이 대표적이며, 병렬식 경전변상도로는 『 아미타경』, 『 관무량수경』, 『 불정심다라니경』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경전에서 강조하고자 한 설화적 내용들을 상징적이면서도 시각적으로 풍부하게 담고 있으며, 경전 내용과 함께 순서대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변문과 함께 제작되었던 변상의 원형 및 변화 양상 등을 유추하게 한다.

경전변상도의 종류에는 주8주9로 직접 그린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와 목판(木版) 또는 동판(銅版)으로 인쇄한 판본변상도(版本變相圖)가 있다. 경전변상도는 장황한 경전의 내용이나 심오한 교리적 의미를 한 폭의 그림이나 삽도 등으로 요약하여 함축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며, 전각용 불화에 비해 제작이 용이하고 이동과 보급이 쉬워 이른 시기부터 다량 제작되었다. 현전 사례로 보았을때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금과 은을 사용한 화려한 사경이 제작되었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사경변상도는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754~755)과 함께 출토된 변상도이다. 이 변상은 부식으로 인하여 현재는 그림이 두 조각으로 나누어진 상태인데, 한 면에는 은니(銀泥)로 그린 역사상(力士像)과 보상화(寶相華)가, 다른 한 면에는 금은니(金銀泥)로 그린 불보살도가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한 장의 종이 양면에 각기 다른 변상이 그려진 구성은 이 변상도가 사경의 표지이자 권수변상도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음을 보여주어 사경의 표지화와 권수화가 분리되기 전 초창기 사경변상도의 형태를 가늠하게 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국가에 사경원(寫經院)을 둘 정도로 사경의 제작이 성행하였다. 고려는 국초부터 왕실에 의한 대장경 사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281년에는 고관 염승익(廉承益)의 저택에 금자사경소(金字寫經所)가 설치되는 등 왕실과 개인들이 사경을 조성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현전작 중 가장 오래된 고려의 사경변상도는 1006년 목종[穆宗, 재위 9971009]의 어머니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외척 김치양(金致陽)이 발원한 『감지금니대보적경(紺紙金泥大寶積經)』 변상도이다. 이 변상도에는 은니를 이용하여 등간격으로 나란히 서있는 3위의 보살이 꽃을 뿌리는 산화 공양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 보살 중 두 보살은 꽃이 담긴 바구니를 가슴 앞에 들고 있고 한 보살은 한 손은 가슴 앞에 다른 한 손은 바닥을 향해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보살들의 풍만하면서도 균형잡힌 체구와 둥글고 풍만한 얼굴 등이 매우 수려하고 유연한 필치로 그려져 있으며, 이 변상에서는 통상적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구획으로 여겨지는 난곽의 구획을 벗어나 그림의 상단에는 비파와 같은 악기들이 율동감이 느껴지게 날아다니고 있고, 하단에는 갖가지 꽃과 풀들이 피어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일본 곤고부지[金剛峯寺] 소장 『법화경』(1081년)은 현존하는 고려의 법화경사경 중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7권본[계환해(戒環解)]이 아닌 8권본의 『법화경』을 주10 이 사경변상도는 중앙의 본존을 중심으로로 성문과 보살들이 시립하고 있는 후불도 형식의 권제 1의 변상을 제외하고, 28권까지의 변상도는 모두 화면의 우측에 노대(露臺) 위에 자리한 본존을 중심으로 하는 설법도를 배치하고 화면의 좌측에 각 권의 세부 내용을 도해하는 전형적인 사경변상도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 사경은 대보적경변상과 마찬가지로 경직되지 않고 유연한 필선으로 그려져 11세기 고려 사경의 수려한 솜씨를 엿볼 수 있있으며, 도상의 배치 또한 공간을 가득 메우는 고려 후기의 사경들과는 달리 공간의 여유를 보인다.

고려 후기에도 왕실에 의한 대장경 사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왕실발원의 사경으로는 충렬왕이 발원한 『불공견색신변진언경(不空羂索神變眞言經)』(1275년), 『문수사리문보리경(文殊師利問菩提經)』(1276년),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1280년) 등을 비롯하여 염승익 발원의 『법화경』(13세기) 등이 전한다. 이 경전들에는 권수에 공통적으로 화염에 둘러싸인 역동적이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신장상이 금니로 그려져 있다. 신장상은 불법수호의 의지를 드러내는 호법신으로서 종종 경전의 앞이나 마지막에 등장하며, 고려사경에서는 13세기 말에 권수화로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이 밖에도 『화엄경』과 『법화경』의 사경변상도가 다수 제작되었다. 이 두 경전의 변상도는 앞서 언급한 곤고부지 소장 법화경 변상도와 같이 화면의 좌측에는 부처의 설법 장면을, 우측에는 경문과 관련된 내용을 도해한 형식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에는 사경의 제작과 함께 목판경전의 간행도 활발하였다. 1007년(목종 10) 개성 총지사(摠持寺)에서 주지 홍철(弘哲)이 간행하여 탑 속에 공양한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 변상은 현전 유물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변상은 세로 6.8㎝, 가로 10㎝ 정도의 매우 작은 그림이지만, 그 안에 부처님이 한 바라문의 공양을 받으러 가는 도중 오래된 에 이르러 설법하는 장면과 이 경을 사경하여 탑 속에 봉안함으로써 얻어지는 무한한 공덕이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판본변상화로는 일본 난젠지[南禪寺] 소장 고려 초조대장경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의 「어제불부 · 어제전원가(御製佛賦 · 御製詮源歌)」 판화(11세기), 해인사의 사간판(寺刊版) 80권본 『화엄경』[완질 80매]과 60권본 『화엄경』[12매 현존]의 판화를 비롯한 정안(鄭晏)이 발원한 『불설예수시왕생칠경』(1246년) 판화, 전라도 남원(南原) 개판 『금강경』 판화(1363년), 개성 영통사(靈通寺) 『화엄경소(華嚴經疏)』권제41의 판화(1372년) 등이 있다.

조선시대

조선의 건국 초기에는 사경의 제작이 태조와 일부 왕실 일원들의 비호 아래 그 전통을 이어가긴 하였다. 하지만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호화스러운 금 · 은니 사경의 제작은 고려시대처럼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으므로 그 수량이 급격히 감소하였고 질적으로도 쇠퇴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경변상도로는 1400~1404년에 익안대군(益安大君)이 발원한 『법화경』과 1415년 이씨부인이 남편의 명복을 빌며 발원한 『법화경』, 1422년 비구 덕명(德明)이 발원한 『법화경』 변상도 등이 있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사경들은 『화엄경』을 비롯한 다양한 경전들이 사성되었던 고려에 비해 『법화경』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시대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목판인쇄술이 보편화되고, 개국초 세조를 중심으로 한 왕실의 호불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언해본 불경과 함께 다양한 판본변상도가 삽입된 경전들을 다량으로 간행하였다. 조선시대의 판본변상도는 『법화경』, 『화엄경』, 『아미타경』과 같이 시대를 막론하고 꾸준히 간행되어온 경전들 뿐만 아니라 유교 사회 속에서 새롭게 주목받았던 『부모은중경』의 간행이 매우 빈번했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다. 또한 15세기에는 동시기 명대(明代)의 판본변상들이 왕실의 일원들이 발원한 경전이나 불화를 통해 즉각 조선시대 변상판화나 불화의 양식에 영향을 미쳤고, 이 판본변상들이 전국의 사찰들로 퍼져나가 고려 이래로 전해져 내려오던 전통적인 변상들과 함께 조선시대 판본변상의 근간이 되어 지속적으로 간행되었다. 『부모은중경』 판본변상은 고려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법화경』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간행되었으며, 현재까지 80여종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80여종의 판본들을 판종에 따라 분류하면, 크게 9종으로 분류된다. 이 9종의 판종에 그려진 변상들은 1796년 새롭게 밑그림을 그려 개판한 용주사본을 제외하면 그 기본적인 도상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이 판본들은 1593년[명(明) 만력(萬曆) 21년]의 판본을 복각한 쌍계사본(1681년) 1종을 제외하고 현존 가장 이른 판본인 고려 1378년본부터 조선시대까지 모두 권수설법도 없이 총 21장의 변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주사본(1796년)은 기존의 도상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롭게 그린 밑그림을 마련하였고, 부모 은혜의 막중함을 비유한 8개의 도상을 첫 장면만 수용하여 전체를 14장의 변상으로 재구성하였다.

또한 판본 변상 중 경전에 삽입되는 변상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제작된 단폭변상판화들이 있다. 이 판화들은 ‘불법의 전파와 인시(印施)의 공덕’을 위해 제작, 간행되었으며, 예경이나 기도를 목적으로 하는 예배용과 일종의 부적의 역할을 하는 호신용으로 개판되었다. 이 중 불보살도나 설법도는 예배나 염불수행을 위한 시각적 교재로서 활용되었으며, 이와 같이 특정의 불화가 대량인출을 위한 판화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해당 도상과 관계된 신앙이 유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해인사 소장의 아미타독존내영도 · 아미타삼존도[고려말~조선초]와 석가설법도(1501년), 은진(恩津) 쌍계사본(1571년)을 비롯한 일련의 권수정업왕생첩경도(勸修淨業往生捷經圖)관음보살이 일반인의 모습으로 표현된 관음보살도, 개심사 소장 석가설법도(1571년), 은진 쌍계사 치성광여래강림도(熾盛光如來降臨圖)(1580년), 회안사(會安寺) 간행 삼장보살도(1581년) 등과 같은 후불화 형식의 예배용 불화와 『진언집(眞言集)』의 도상, 진언, 부적 등을 한 장의 판목에 모아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재구성한 신흥사(神興寺) 소장 신묘장구대다라니도(神妙章句大陀羅尼圖)[조선]와 같은 다라니류가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빅터 메어, 『그림과 공연: 중국의 그림 구연과 그 인도 기원』(김진곤 등 옮김, 소명출판, 2012)
김정희, 『찬란한 불교미술의 세계, 불화』(돌베개, 2009)
『사경 변상도의 세계: 부처 그리고 마음』(국립중앙박물관, 2007)

논문

김자현, 「朝鮮前期 佛敎變相版畵 硏究」(동국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7)
박도화, 「의미와 유형으로 본 ‘變相’의 分化」(『미술사학연구』 277, 한국미술사학회, 2013)
김자현, 「海印寺 寺刊版 60華嚴經 變相版畵 硏究」(동국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7)
박도화, 「朝鮮 前半期 佛經版畵의 硏究」(동국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8)
장충식 , 「韓國 佛敎版畵의 硏究(I)」(『佛敎學報』 19,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1982)
주석
주1

사당(四唐)의 둘째 시기. 현종 2년(713)에서 대종 때까지의 시기로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과 같은 위대한 시인이 나왔다. 이 시기에 당나라 시가 가장 융성하였다. 우리말샘

주2

인도 중부 마가다 사위성(舍衛城) 남쪽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있는 절.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설법하고 수도할 수 있도록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세웠다. 우리말샘

주3

사당(四唐)의 마지막 시기. 즉 836년에서 907년 사이의 시기를 이르는데, 이상은·두목·사마예·장교(張喬) 등이 활약하였다. 우리말샘

주4

중국 당나라 중기 이후에 승려가 속인을 대상으로 행하였던 통속적인 설법. 변문(變文)을 교재로 하고 변상도를 보이면서 설법하였다. 우리말샘

주5

중국 당나라 중기부터 북송 초기에 걸쳐 민중 사이에서 유행한 민간 문학. 절에서 속강(俗講)을 설법하는 승려가 신자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불경의 이야기를 구어나 속어로 쉽게 풀어 하던 설법에서 비롯되었으며, 운문과 산문을 교대로 사용하여 이야기해 나간다. 우리말샘

주6

둔황 동남쪽에 있는 석굴 사원. 약 500개의 석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353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3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본생담 및 정토변상의 벽화·진흙상이 있는, 불교 사상의 세계적 유적이다. 초기의 것은 간다라 말기의 양식을 나타낸다. ⇒규범 표기는 ‘둔황 석굴’이다. 우리말샘

주7

동화, 야담, 만담 따위를 여러 사람 앞에서 말로써 재미있게 이야기함. 우리말샘

주8

아교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쓸 때 사용하며, 특히 어두운 바탕의 종이에서 독특한 효과를 낸다. 우리말샘

주9

은가루를 아교 물에 갠 것. 글씨나 그림에 쓰며, 어두운 바탕의 종이에서 독특한 효과를 낸다. 우리말샘

주10

현재까지 고려 법화경사경 중 8권본은 곤고부지소장본 이외에 나베시마보효회[鍋島報效會] 소장 고려 『법화경』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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