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이다. 안평(安平)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 천석주인(泉石主人) 등이며,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1428년(세종 10)에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만 11세 때인 1429년(세종 11)에 정연(鄭淵, 13891444)의 딸과 혼인하여 인왕산 밑 수성궁(水聲宮)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441년(세종 23)부터 집현전 학사들의 교육을 받으며 학문과 예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세종은 안평대군에게 안일하다는 의미의 ‘안평’ 대신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다는 뜻의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신숙주(申叔舟), 박팽년(朴彭年)과 같은 집현전 학사들도 안평대군의 명석한 재능과 덕성을 높이 평했으며, 성현(成俔)은 안평대군의 서법(書法)이 천하제일이라고 칭송했다. 1453년(단종 1)에 그의 친형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면서 안평대군은 강화도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안평대군은 원나라의 문인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송설체(松雪體)를 토대로 서법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명으로 당대 문인들의 팔경시(八景詩)를 엮어 만든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은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조선 초기 시화(詩畵) 향유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글과 글씨를 잘했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안목이 있어 조선 초기 서화 발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47년(세종 29) 음력 4월 20일 밤, 안평대군이 박팽년, 신숙주, 최항(崔恒)과 함께 도원을 거닐었던 꿈의 내용을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제첨(題簽)과 시문(詩文)이 안평대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안평대군은 그림도 잘 그렸다고 전하지만 남아 있는 작품은 없다. 그러나 신숙주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안평대군이 서화를 사랑하여 누가 조그마한 쪼가리라도 가지고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샀고, 그중 좋은 것은 표구하여 소장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이 문집의 「화기(畵記)」에서 안평대군이 중국 송 · 원대의 작품, 특히 북송(北宋) 곽희(郭熙, 11세기)의 그림을 많이 소장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우리나라 화가 중에서는 안견의 그림을 30점이나 소장하여 안견에 대한 선호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안평대군 이용 집터가 남아있다. 안평대군이 정자를 세워 글을 짓고 활을 쏘던 무계정사(武溪精舍) 터로 알려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