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2년(세종 24)에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주선으로 고려의 이인로(李仁老)와 진화(陳澕), 조선의 김종서(金宗瑞) 등 19명의 시문을 두루마리로 꾸민 것을 첩장(帖裝)으로 개장한 시첩이다.
비해당(匪懈堂)은 안평대군(1418∼1453)의 호로, 당시에는 중국 송나라 영종(寧宗, 재위 1194∼1224)의 팔경시(八景詩)를 모사하고 팔경도(八景圖)를 그려 판각하였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소상(瀟湘)은 소수(瀟水)가 상수(湘水)에 합류되어 동정호(洞庭湖)로 들어오는 곳의 물 이름이다. 동정호는 물론 그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은 일찍부터 시인묵객과 화가의 소재로 이용되어 왔다. 이것을 여덟 항으로 나누어 팔경이란 명칭을 붙인 이 소상팔경은 북송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명종이 문신들에게 소상팔경시를 짓게 하고, 이광필(李光弼)에게 이에 따라 팔경도를 그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작품은 2004년 5월 7일 보물로 지정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첩의 제작은 비해당이 『동서당고첩(東書堂古帖)』에서 영종의 팔경시를 본 것이 동기가 되었다. 『동서당고첩』은 명 태조의 손자인 주헌왕(周憲王) 주유돈(朱有燉)이 세자로 있을 때에 판각한 법첩이다.
팔경도는 비해당이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에게 부탁하여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숙주의 「화기(畵記)」에 ‘안견팔경도각일(安堅八景圖各一)’이라 하여, 안견의 작품 중 이것을 첫째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작품이 수록된 시인으로 고려의 2인과 조선의 시인으로 김종서를 비롯하여 이영서(李永瑞)·하연(河演)·정인지(鄭麟趾)·조서강(趙瑞康)·안숭선(安崇善)·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안지(安止)·강석덕(姜碩德)·최항(崔恒)·남수문(南秀文)·신석조(辛碩祖)·이보흠(李甫欽)·유의손(柳義孫)·김맹(金孟)·만우(卍雨)·윤계동 등은 세종 당시의 인물들이다.
이들의 시문은 찬자(撰者) 자신의 진필(眞筆)로 판단된다. 이영서의 서문은 만우의 시 다음에 위치해 있던 것을 최근에 옹정춘의 제어(題語) 다음으로 옮겨 개장하였다.
모두 45면으로, 원첩의 크기는 길이 42㎝, 너비 35㎝ 정도이며, 내용은 작품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길이는 가장 긴 것이 40㎝, 가장 짧은 것이 19.5㎝이고, 가로가 가장 긴 것은 32㎝, 가장 짧은 것은 17.4㎝이다.
지질은 모두 안평대군가에서 나누어준 것으로 인정되는 미립금점(微粒金點)이 별처럼 찍힌 유색(有色)의 중국산 금전지(金箋紙)이다.
시의 체재는 오언고시, 오언배율, 오언절구, 칠언고시, 칠언율시, 칠언절구, 육언절구 등 다양하다.
권수(卷首)의 이인로와 진화의 시는 팔경을 산시청람(山市晴嵐), 연사모종(烟寺暮鍾), 어촌석조(漁村夕照), 원포귀범(遠浦歸帆), 소상야우(瀟湘夜雨), 평사낙안(平沙落雁), 동정추월(洞庭秋月), 강천모설(江天暮雪) 등의 순서대로 나누어서 지었는데, 이인로의 시는 칠언절구이고, 진화의 시는 팔구체의 칠언고시이다.
그러나 당시의 작가들은 대부분이 팔경의 내용을 따로 나누지 않았고, 다만 강석덕·성삼문·만우 등이 팔경을 나누어서 지었다.
단종 즉위에서 세조대에는 사육신 등 신진학자들이 많이 희생당하고 집현전이 폐지되어 당시의 업적들이 별로 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저명한 문인 19인의 유묵을 직접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문학적인 면에서도 매우 값진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