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현지(顯之). 고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안축(安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역임한 안종원(安宗源)이고, 아버지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안경공(安景恭)이다. 어머니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사도(鄭思道)의 딸이고, 부인은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의 딸이다.
1380년(우왕 6) 10세의 나이에 음보로 행랑도감판관(行廊都監判官)에 임명되었다. 1383년에는 진사시, 1388년에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1389년에는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으며,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되자 사재주부(司宰注簿)로 발탁되었다.
1393년에 사헌감찰, 이듬해에 좌습유 겸 지제교(左拾遺兼知製敎)로 승진하였다. 1396년 김해판관으로 좌천된 적도 있으나 1397년에 예조좌랑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으로서 중앙 관리로 복귀하였다. 1398년 여름에 강원도도사가 되었다가 이 해 가을에 사헌잡단(司憲雜端)으로 다시 중앙에 복귀하였다.
사헌잡단으로 재직할 때 궁녀 한 명이 죄를 범하자, 태조는 당시 대사헌이던 조박(趙璞)에게 그 궁녀를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조박이 안순에게 곧 처형할 것을 명했으나, 안순은 “사헌부는 형관이 아니며, 더구나 그 사람의 죄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처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조박은 안순에게 명령대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극형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 우선 유사(有司)에 명해 심문부터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화가 암시하듯이 안순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1401년(태종 1) 병조정랑 겸형조도관, 1403년 겸사평부경력(兼司平府經歷)·장령(掌令)을 거쳐, 1407년 우부대언(右副代言), 1409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경상도관찰사, 1411년 좌군총제(左軍摠制)·집현전제학, 1414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 호조참판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0년 공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423년 함길도도관찰사에 이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 해 호조판서, 1432년 판중추원사 겸판호조사(判中樞院事兼判戶曹事), 1435년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1437년 충청도의 기근을 수습하기 위한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로 임명되어, 잘 수습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올랐다.
오랫동안 호조판서 또는 판호조사를 겸하면서 국가의 전곡(錢穀)을 관장했는데, 경비 출납에서 추호도 틀림없이 정확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관직을 역임했지만 특히 국가의 재정을 책임 맡은 직에서 가장 공로를 쌓았던 것이다.
1439년에 신병으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은퇴했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저술로는 『근재집(謹齋集)』 부록에 유고가 실려 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