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왕비.
이칭
시호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365년(공민왕 14)
사망 연도
1420년(세종 2)
본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관련 사건
제1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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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원경왕후는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왕비이다. 1365년(공민왕 14)에 태어나 1420년(세종 2)에 사망했다.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 이방원을 도왔다. 이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라는 칭호를 얻었다. 성품이 굳세고 사나워 후궁을 두는 문제로 태종과 불화가 심했고 친정 동생들로 인해 폐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하려 한 태종의 정책에 동생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자진했고 나머지 두 형제마저 불충 죄로 잃는 불행을 겪었다.

정의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왕비.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이다. 1382년(우왕 8) 이방원(李芳遠)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태조 1)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 이방원을 도왔다. 1400년(정종 2) 2월에 이방원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어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이 해 11월에 이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鄭道傳) 등이 주살될 때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태조가 몸이 불편해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이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10여 일 전에 여러 왕자가 거느린 시위패(侍衛牌: 고려 말 조선 초 양인 농민으로 구성된 국방의 주 담당 병종으로 일명 시위군이라고도 함)를 혁파하고 영중(營中)의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무기를 몰래 숨겨 두었다. 일이 발생하던 그 날 이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며 선수를 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종 초부터 궁녀의 상종문제로 태종과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태종과의 불화는 성품의 강한(强悍: 마음이나 성질이 굳세고 사나움)과 빈어(嬪御: 빈들이 왕을 모심) 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았다. 1407년(태종 7) 7월에 발발한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더욱 심각해졌다. 민무구 형제는 이미 1402년(태종 2)에 왕이 창종(瘡腫: 헌데가 생겨 부은 것)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녀를 끼고 왕의 병세를 염탐하며 은근히 집권 기회를 노렸다는 의심을 받았다. 정비가 이에 관여한 것 같지는 않으며,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민무구 형제가 불충죄로 몰리는 한 원인이 된 것은 틀림없다.

1406년(태종 6) 8월에 난데없이 일어난 선위파동(禪位波動: 왕위를 물려주는 일에 관련된 파동)은 민무구의 투옥을 유발하였다. 이는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정비의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불평은 태종의 비위에 거슬려 곧 그들 사이를 더욱 벌려 놓았다. 또 민무구 형제들의 방자한 행동을 부추겼다. 민무구 형제가 옥에 갇힌 지 4개월 후, 정비가 금령을 범하고 친정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 그들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만다. 친정과 내통한 일이 있던 직후, 민무구 형제의 직첩(職牒)을 거두어 서인을 만들 정도로 태종은 격분하였다.

그뒤 민무구 형제는 정비의 면목과 장인 민제와 빙모 송씨(宋氏)의 생존으로 인하여 겨우 생명을 보전해 나갔다. 1408년 9월 민제가 죽자, 같은 해 10월에 태종은 그들의 열 가지 죄를 열거한 교서를 반포하였다. 1409년 10월에 그들의 투옥에 관련된 이무(李茂)를 죽였다. 1년 뒤에 제주도로 귀양가 있던 민무구 형제는 자진(自盡)하는 비운을 당하였다. 그 동안 정비는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여러 번 샀다. 그리하여 민무구 형제가 죽은 지 1년 남짓 된 11월 9일에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태종은 내사(內事: 왕궁 안의 일 혹은 내명부의 일)를 대신 섭주(攝主)할 만한 여자를 간택하려고 일빈이잉(一嬪二媵: 정실 왕비 대신에 1명의 빈과 2명의 애첩을 두는 것)의 빈어제도를 정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金九德)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明嬪)에 봉하였다. 또한 전 제학 노구산(盧龜山)의 딸과 전 지함주사 김점(金漸)의 딸을 잉실(媵室: 첩 혹은 후궁을 이르는 말)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昭惠宮主)와 숙공궁주(淑恭宮主)로 봉하였다.

민씨 형제의 투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5년 뒤에 민무휼(閔無恤) · 민무회(閔無悔) 두 형제에게 비화하였다. 1415년(태종 15) 4월 염치용(廉致庸) 등의 노비소송사건에 두 형제가 연루된 것이 복잡하게 얽혀 확대되어 갔다. 그러다 두 형제는 궁녀(민씨 몸종)의 소생 원윤(元尹) 비의 참고(慘苦: 참혹한 고통)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외방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불충으로 몰려 자진하는 불행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정비는 태종의 무자비한 외척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한때 누렸던 영화의 꿈도 일장춘몽이 된 채 친정 4형제를 참혹하게 잃는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해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봉하였으며, 1420년 7월 56세로 사망하였다. 소생은 세종과 양녕(讓寧) · 효령(孝寧) · 성녕(誠寧)의 3대군과 정순(貞順) · 경정(慶貞) · 경안(慶安) · 정선(貞善)의 4공주가 있다. 시호는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이다.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번지 1호에 있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선원계보(璿源系譜)』
「태종의 외척제거에 대하여: 민씨형제의 옥」(김성준, 『역사학보』17·18합집, 1962)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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