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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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고려 말 조선 초 중앙군의 기간을 이룬 병종. 고려 말 이래 기선군(騎船軍)과 함께 양인 농민으로 구성된 국방의 주담당 병종으로 일명 시위군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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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말 조선 초 중앙군의 기간을 이룬 병종. 고려 말 이래 기선군(騎船軍)과 함께 양인 농민으로 구성된 국방의 주담당 병종으로 일명 시위군이라고도 하였다.
개설

고려 말 잦은 왜구의 출몰과 전란으로 중앙의 중신(重臣)들은 항시 각도의 절제사를 겸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또 통제력이 약화된 정부는 군대의 징발과 통솔권을 이들 절제사에게 일임하였다. 때문에 패기(牌記)라고 불리는 군적을 절제사들이 관리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군사와 절제사 사이에는 국가 권력의 매개 없이 직접적 관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군사들은 절제사의 사병(私兵)이라 지칭되기도 하였다.

내용

장수들은 휘하 병사를 사역시키거나 방군(放軍)해 사리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소관의 군사는 상경해 그 장수의 거처를 시위하기도 했는데 이로부터 시위패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한 다음날 설치한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는 그의 정치력 확장과 병권 확대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함경도 지역 토착적 시위패가 대다수를 점하였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원종시위패로 봉해졌던 것이다.

조선의 개창과 더불어 종친과 대신에게 제도(諸道)의 군사를 나누어 관장하게 한다는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고려 말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유력자들에게 절제사의 직임을 띠게 하고 관할 지역내의 군사에 대한 징발과 통솔을 일임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각 도절제사는 직접 관할 지역의 관아에 공문을 띄워 모든 군정을 골라서 뽑아 서울에 올라오도록 했고 이렇게 해서 상경하는 군사를 시위패라 하였다. 이들은 사병적 성격을 띠면서 동시에 국방 병력으로 중앙의 주요한 군사력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조처는 고려 말 이래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를 강조했던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 정책수립자들의 “주군(州郡)의 병이 번상숙위함으로써 내외상제(內外相制)하게 한다.”는 원칙에 한층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중앙의 군부로서 1393년(태조 2)에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1394년부터 진법 훈련을 강화하고 여기에 시위패도 참가시켰다. 이는 각 절제사와 사적 영속관계에 있던 시위패를 국가적 목적에서 국가 기관이 훈련시킴으로써 사적 성격을 소멸시키려는 조처였다 하겠다. 왕조가 점차 안정됨에 따라 병권을 귀일(歸一)시키자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399년(정종 1)에는 강원도와 동북면의 방원(芳遠), 경기도와 충청도의 방의(芳毅), 풍해도와 서북면의 방간(芳幹), 경상도와 전라도의 이저(李佇), 그리고 참찬문하부사 이거이(李居易)·조영무(趙英茂), 참지문하부사 조온(趙溫)·이천우(李天佑) 등 8인에게 시위패의 분장(分掌)을 허락하고 그 밖의 절제사를 모두 혁파하였다.

이듬해에는 대사헌 권근(權近) 등의 상소로 왕과 왕세자의 시위를 제외한 일체의 사문숙직(私門宿直)을 불허하는 사병혁파령을 내려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모두 귀향시켰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군적을 삼군부에 보내 공병화(公兵化)하였다.

사병혁파 후 시위군으로 갑사(甲士)의 수를 계속 증원하다가 1414년(태종 14) 재정 문제로 3,000인 가운데 1,000인만 남기고 지방의 번상 병력인 별패(別牌)를 늘려 종래 갑사가 맡았던 임무를 대행시켰다.

별패란 시위패의 상층부를 이루는 기병으로 경기도 350인, 충청도 700인, 전라·영안·강원도 각 450인, 상주·진주·풍해·평안도 각 400여인 등 도합 4,000인이었다.

1457년(세조 3) 제색군사를 모두 오위(五衛)에 분속시킬 때 충찬위(忠贊衛)·별군과 함께 경시위패는 후위(後衛: 忠武衛)에 속하였다. 이 무렵 여러 도의 군사 가운데 평안도·함경도의 군사를 정군(正軍)이라 하고, 그 밖의 각 도 군사는 시위패라 하였다.

또, 정군의 통할자를 백호·천호라 하는데 비해 시위패의 통할자는 총패(摠牌)라 하였다. 또한, 정군에게는 복무 연한을 계산해 산직(散職)을 제수했으나 시위패는 아무리 오래도록 번상시위해도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다.

1459년부터 정군과 시위패를 모두 합해 정병(正兵)이라 하였다. 이들은 8번으로 나누어 교대하며 2개월 복무하도록 했는데 봉족 2인을 주었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한국군제사-근세조선전기편-』(육군본부, 한국군사연구실, 1968)
「조선초기오위(五衛)의 병종」(천관우, 『사학연구』 18,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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