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월산 기림사 ( )

불교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삼국시대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창건한 사찰.
유적/건물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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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기림사는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에 있는 삼국시대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창건한 사찰이다. 임정사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가 중창하여 기림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신라 신문왕이 들른 바가 있으며, 고려 말의 각유가 주지로 있었다.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중건, 중수하였으나 1862년 대화재로 소실되었으며, 그 이후로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른다.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비로자나삼불회도, 건칠보살반가상이 있으며, 그 외 다수의 지정문화재가 전한다.

목차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삼국시대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창건한 사찰.
연원 및 변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주1이다.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주2를 뜻한다. 신라 신문왕은 대왕암(大王巖)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의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 말의 각유(覺猷)는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 그 뒤 1578년(선조 11)에 축선(竺禪)이 중건하였고,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주3주4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 13)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주5가 재가 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복원하였다. 그 뒤 1878년(고종 15)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慧訓)이 다시 중수하였다. 삼십일 주6 시대에는 주7 일대를 관장하였으나, 현재는 불국사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 주8, 서쪽에 오백나한전과 정광여래사리각(正光如來舍利閣)인 삼층전(三層殿)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무량수각과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현황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기림사 응진전(應眞殿), 앞쪽에 진남루가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고, 뜰에는 기림사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한 석등이 있다. 조금 떨어져 명부전 · 삼성각 · 관음전 · 산신각 · 주지실 · 종무소 · 요사채 · 산문(山門) · 창고 등이 있으며, 특히 대방(大房)은 2동이 모두 중후하다. 그 밖에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이들 당우 중에서 대적광전은 절의 본당으로 1629년(인조 7)에 크게 고친 것이다. 17세기 건축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로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적광전 내부에는 16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기림사 소조 비로자나삼불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상은 전단토상(栴檀土像)으로 중원(中原)의 장인이 조성하였다는 조성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198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986년 9월에 가운데 주존불의 복장에서 『대반야경』 등 금 · 은 사경 14권과 조선시대에 만든 불경,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등이 발견되었다. 경주 기림사 소조 비로자나불 복장전적이라는 명칭으로 198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적광전의 주9로 봉안된 경주 기림사 비로자나삼불회도는 1718년(숙종 44)에 천오, 임한 등의 화승이 제작한 것으로, 200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991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약사전에는 약사삼존상과 사천왕상, 사라수왕(沙羅樹王)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탱화는 기림사 창건의 연기 주10를 보여 주는 특이한 불화로서 근래 이를 모사하여 다시 그렸다.

1985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응진전 안에는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1965년 보물로 지정된 경주 기림사 건칠 보살 반가상과 1985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삼층 석탑, 1991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진남루가 있다.

이 밖에도 목탑지(木塔址) · 석조치미(石造鴟尾) · 주11 등도 있다. 이 중에서 석조치미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주12 장식이 있으며,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 특이하게 석비 모양의 나무에 사적을 기록한 목비가 전한다. 절에 전하는 석조 치미 1점과 금구 1점, 나무 비석 8점은 1995년 경주기림사소장유물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문적 중에는 『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 『부호장생생가(府戶長生生家)』 등이 있다. 이들은 경상도와 경주의 행정에 관한 것과 행정관에 대한 인적 사항, 신라 이후의 지방 제도의 변혁 등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들이다. 이 절에는 조선 역대 왕들의 주13도 보관되어 있다.

이 절에는 원래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 중 장군수(將軍水)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친다 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시대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나한전 앞쪽 탑 자리에도 샘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도로 확장 때 매몰되었으며, 현재는 큰 방 옆과 아랫마을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절에는 또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라는 한약초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한방서에도 그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신증동국여지승람』)
「기림사중창기(祇林寺重創記)」

단행본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상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논문

박용진, 「慶州 祗林寺의 창건과 역사」(『남도문화연구』 33, 2017)
한기문, 「고려시대 경주 기림사(祇林寺)의 위상과 소속변화」(『한국사연구』 194, 2021)
홍윤식, 「기림사의 가람구조와 그 의미」(『불교미술』 15, 1998)
주석
주1

불교의 한 종파의 우두머리인 큰절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 또는 큰절에서 갈라져 나온 절. 우리말샘

주2

인도 중부 마가다 사위성(舍衛城) 남쪽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있는 절.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설법하고 수도할 수 있도록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세웠다. 우리말샘

주3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 우리말샘

주4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다. 우리말샘

주5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6

우리나라에 있는 서른한 곳의 불교 본산. 1911년에 조선 총독부에서 우리나라 불교를 통제하기 위하여 전국 사찰을 31개소로 나누고 구역마다 본산 하나씩을 두었다. 서울특별시의 봉은사, 경기도 남양주의 봉선사와 화성의 용주사, 인천광역시 강화의 전등사, 충청북도 보은의 법주사, 충청남도 공주의 마곡사와 금산의 보석사, 전라북도 완주의 위봉사,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ㆍ순천의 송광사와 선암사ㆍ구례의 화엄사ㆍ해남의 대흥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와 양산의 통도사, 부산광역시의 범어사, 대구광역시 달성의 동화사, 경상북도 경주의 기림사ㆍ영천의 은해사ㆍ의성의 고운사ㆍ문경의 금룡사, 강원도 평창의 월정사ㆍ고성의 유점사와 건봉사,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ㆍ함흥의 귀주사, 평안북도 영변의 보현사, 평안남도 평양의 영명사ㆍ평원의 법흥사, 황해도 황주의 성불사와 신천의 패엽사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7

‘경주군’의 옛 이름. 우리말샘

주8

약사유리광여래를 모신 법당. 우리말샘

주9

불상 뒤에 모시는 탱화. 우리말샘

주10

어떤 사물의 기원과 관련된 설화. 지명 연기 설화, 사원 연기 설화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11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 우리말샘

주12

꽃 모양의 무늬. 우리말샘

주13

임금이 손수 글씨를 씀. 또는 그 글씨. 우리말샘

집필자
최선아(명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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