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751년 김대성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석가탑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경덕왕이 즉위한 742년 불국사의 두 탑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하여 창건 연대가 정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주요 전각이 불타 없어져 17세기에 중창하였으며, 1970년대의 복원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두 탑과 석조물은 창건 때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복원된 목조건물의 시대양식은 혼재되어 있다. 1995년에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 조에 따르면,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는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 700~774)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 판독과 역주가 완료된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발견 문서에는 경덕왕이 즉위한 742년, 김대성이 중시(中侍)가 되기 이전에 불국사의 동서 양 탑 건축을 시작하여 혜공왕 대에 공사를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보다 먼저 쓰인 이들 문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불국사는 742년에 처음 건설된 것으로 판단된다.
불국사 창건에 관하여 이와 다른 이야기도 있다. 1740년(영조 16)에 편찬된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는 “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다음 해인 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어서 “574년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다르지만, 김대성이 창건하기 전에 불국사가 신라 왕실과 관련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를 제외한 다른 기록과 유물, 유적에서 진흥왕 대의 초창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751년에 불국사 건축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774년에 생을 마쳤고, 김대성을 대신하여 나라에서 건축을 마무리하였다고 나와 있다. 개인이 짓기 시작한 사찰을 나라에서 완공하였다는 내용에 따라, 불국사는 김대성 개인이 자신의 부모를 위해 지은 절이 아니라 신라 왕실을 위한 사찰이었다는 설이 대두되었다.
『불국사고금창기』에는 법흥왕 대부터 18세기 중반에 이르는 불국사 중창의 역사가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김대성이 건설한 후 불국사는 모두 아홉 차례 중창되었다. 신라 하대인 887년, 고려 현종 때인 1024년의 중수를 거쳐 조선시대 들어서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기록만으로는 상세한 중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으나, 억불숭유 정책을 펼쳤던 조선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중수가 계속될 만큼 불국사가 그 명맥을 잃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의 중수는 오늘날 불국사의 가람 구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불국사 지장전 벽 사이에 감추어 둔 무기가 발각되는 바람에 왜구들이 불국사에 불을 질렀다. 이에 장수사(長壽寺)에 있었던 담화(曇華)가 불국사로 왔는데, 이미 대웅전을 비롯해 그때까지 존속하였던 불국사의 건물 80여 동, 2,000여 칸이 모두 전소되었고, 금동불과 석교(石橋), 석탑만이 화재를 입지 않았다.
이로부터 약 20여 년 이후, 소실된 건물 복구가 시작되었다. 1612년(광해군 4)에 해안(海眼)이 좌우 경루와 범종각, 남쪽 행랑을 복구하였고, 1630년(인조 8)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1648년(인조 26)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1659년(효종 10)에는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대웅전과 안양문(安養門),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나한전, 시왕전, 조사전을 중건하였다. 이어 1750년(영조 26)에 극락전이, 1765년(영조 41)에는 대웅전이 중건되었다.
1779년(정조 3)의 중창 불사 내역서인 「불국사복역공덕기(佛國寺復役功德記)」에는 경상도순찰사와 부윤 등의 관직자, 경상도 주요 사찰과 마을에서 힘을 모아 불국사 중창에 나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모든 전각이 일시에 복구된 것이 아니므로 창건 당시처럼 체계적인 가람 배치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건물마다 건축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불국사는 처음에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을 중심으로 5개 구역에 건물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과 천불전(千佛殿), 시왕전(十王殿) 등 현재는 위치를 알 수 없는 45곳의 건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임진왜란 때의 방화에도 불구하고 근대까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잃지 않은 것은 2구의 석탑과 석교를 포함한 석조물이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 역시 고려 초에 지진으로 훼손되었다가 보수되었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해체 보수공사 중 탑신 2층 사리공에서 석탑을 보수한 기록물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함께 발견되었다. 묵서지편(墨書紙片)으로 알려졌던 이 두루마리 기록물은 한데 뭉쳐 있어 그동안 판독하지 못하다가 복원 및 보존 처리를 거쳐 약 40년 만에 공개되었다.
묵서지편은 1024년(현종 15)에 쓰인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와 1038년(정종 4)의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 「불국사탑중보시명공중승소명기(佛國寺塔重布施名公衆僧小名記)」로 이루어진 석탑 중수기로, 고려 전기 두 탑의 중수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은 문서였다. 1038년의 문서 2건은 서석탑 중수를 다룬 동일한 문서가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 따라 원래 경주 불국사 다보탑은 ‘무구정광탑’으로,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은 ‘서석탑’으로 불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불국사가 고려 전기 경주 지역에 일어난 지진으로 훼손되었고,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을 각각 1024년과 1038년에 보수하였음이 밝혀졌다.
1805년(순조 5)에 비로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 이후에는 더 이상 중창이나 보수와 관련한 기록이 없을 정도로 불국사는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 전역의 유적을 조사하던 일본의 건축사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도 1902년(광무 6) 보고서에서 불국사가 상당히 퇴락하였다고 썼다. 1905년(광무 9)에 이미 자하문과 연결된 회랑이 붕괴되어 있었고, 무설전도 1910년 이전에 무너진 상태였다. 일제는 1909년 조선의 고적 조사를 하며 유적의 가치에 따라 갑 · 을 · 병 · 정으로 등급별 분류를 하였는데, 대웅전과 위축전(爲祝殿)에는 ‘을’ 등급을 매겼다.
1918년1919년 조선총독부는 불국사 1차 수리 공사를 하였고, 이때부터 1925년까지 백운교와 청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대웅전 및 극락전 석축을 보수하였다. 1924년1925년에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을 수리하면서 탑을 완전히 해체하였는데, 이때 경주 불국사 다보탑에 있던 사리함과 유물들이 모두 사라졌다. 1934년~1935년에도 석축을 수리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보수공사는 불국사 전면의 다리와 담장 복원에 집중한 토목공사였다. 하지만 중수에 관한 기록이나 사진을 남기지 않아, 당시에도 이것이 올바른 보수인지에 관한 비판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불국사는 중요한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전각의 노후는 막을 수 없었다. 8·15광복 후인 1949년 경상북도 교육국과 경주고적보존회는 불국사 대웅전과 자하문 중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 체계화되지 못한 문화재 정책과 수리 기술자의 고대 건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중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대웅전이 기울어질 정도로 건물과 시설이 쇠락하였다. 이에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불국사 복원을 지시하여 대대적인 복원 및 중창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를 위하여 「불국사복원실행계획서」를 작성하고, 사단법인 불국사복원위원회를 발족하였으며, 경제인 간담회를 개최하여 경제인들로부터 복원에 드는 비용을 모금하였다. 복원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학계 전문가를 중심으로 불국사 고증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복원 설계 및 기초 자료조사를 하여 1970년에 복원 설계안을 완료하였다. 아울러 일본과 국내 사찰들을 조사하여 목조건축의 참고 자료로 삼았다.
1971년에 사찰 입구와 계곡에 있었던 일본식 석축을 헐고 자연석으로 다시 쌓았으며, 무설전과 관음전, 비로전 목공사를 완료하였다. 대대적인 중창 공사로 인해 예산 문제가 발생하자, 불국사 복원은 당시 차관을 얻어 진행 중이던 경주종합개발계획에 편입되어 문화재관리국과 경주시의 예산집행으로 진행되었다. 1978년에는 입장료를 재원으로 하여 선원을 건립하였고, 사천왕문과 일주문을 세웠다.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복원 공사로 인해 목조건물의 양식은 혼재될 수밖에 없었다. 무설전은 고려 중후기 양식, 비로전은 고려 후기 양식, 관음전은 조선 전기 양식, 대웅전 회랑과 극락전 회랑은 조선 중후기 양식으로 복원되어 각 시대의 건축양식이 섞여 있는 상태이다. 결과적으로 김대성이 세웠던 통일신라 건축양식으로의 일관성 있는 복원이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가 있다. 복원 공사 이전에는 불국사에 대웅전과 극락전, 자하문, 안양문, 범영루, 경주 불국사 다보탑,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석등 만이 남아 있었으나, 이 시기의 복원 공사를 통해 무설전과 비로전, 관음전, 좌경루, 대웅전 및 극락전 일대의 회랑 등을 건설하여 현재와 같은 구성으로 가람을 완성하였다.
불국사는 의상계 화엄학파와의 관련 속에 창건되었다. 고려 초의 승려 균여(均如: 923973)가 쓴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에 김대성이 의상(義湘 :625702)의 제자 표훈(表訓)에게 화엄 사상을 배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 9세기 말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대화엄종불국사아미타불상찬병서(大華嚴宗佛國寺阿彌陀佛像讚幷序)」와 「대화엄종불국사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병서(大華嚴宗佛國寺毗盧遮那文殊普賢像讚幷序)」에서 모두 ‘화엄종 불국사’라고 지칭하고 있어, 불국사가 화엄종 사찰이었음을 알려 준다. 따라서 신라에서 이상화한 화엄 불국을 현세에 구현한 것이 불국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 전기 불국사는 법상종(法相宗)에 속해 있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나온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에 ‘유가업불국사(瑜伽業佛國寺)’라고 써 있어 고려 전기에는 불국사가 법상종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도 법상종 사찰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국사가 입은 피해는 지방 관아와 인근의 사원,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중건하여 회복이 가능하였고, 사세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쇠락을 면하지 못하였다. 1911년에 일제는 「사찰령(寺刹令)」을 반포하고, 그에 의거하여 조선의 사찰에도 일본과 같은 본사 · 말사 제도를 도입하였다. 당시 불국사는 쇠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림사(祇林寺)가 불국사 대신 「사찰령」에 따른 조선 사찰 30본산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다. 불국사는 기림사의 말사(末寺)로 편입되었다.
1930년대 중반 승려들과 경주 고적 관계자, 지역 유력자들은 불국사를 본산으로 승격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찰로서 불국사의 위상은 올라가고 있었다, 1959년 불교 정화 과정에서 24곳의 수사찰(首寺刹)이 지정되었는데, 불국사가 여기에 포함되면서 비로소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사찰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람을 정비하기 시작하면서, 수행 도량으로서 불국사의 위상은 점점 더 공고해져 갔다. 또한 불국사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에는 토함산 석굴암(吐含山 石窟庵)과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 때 처음 창건된 불국사는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을 중심으로 구성된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여 준다. 주요 건물들은 모두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크고 작은 석재를 쌓아 반듯하게 석축을 만들고, 그 위에 건립하였다. 석축과 석교, 기단 등은 대부분 신라의 유구이며, 대웅전과 일부 목조건물은 조선 후기에 재건되었다. 비로전을 포함하여 경루와 회랑 등은 문헌 기록과 유구를 바탕으로 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 중앙에 자리한 경주 불국사 대웅전(慶州 佛國寺 大雄殿)은 1765년에 중창되었다.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2011년 12월 30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내부 정면 수미단(須彌壇) 위에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 갈라보살로 구성된 삼존불이 있고, 그 좌우에 가섭(迦葉)과 아난(阿難) 소조상 2구가 안치되어 있다.
외형이 전혀 다른 2기의 석탑은 속칭 석가탑과 다보탑으로 불리지만, 이는 근대에 붙여진 명칭이다.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에 따르면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은 무구정광탑으로,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은 서석탑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은 신라 3층 석탑의 전범이 되는 비례를 잘 갖춘 탑으로, 경주 불국사 다보탑은 전례 없는 독특한 형태의 석탑으로 주목받는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은 1962년 12월 20일에 각각 국보로 지정되었다.
경주 불국사 대웅전 뒤에 있는 무설전은 현대에 재건한 건물로, 설법을 하기 위한 강당이다. 1593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708년(숙종 34)에 중건하였다. 1910년 이전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그 뒤 허물어진 채 방치되었으며, 1969년~1973년 불국사 복원 공사 때 복원하였다.
석교인 연화교 · 칠보교에서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른다. ‘안양(安養)’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에 들어서는 문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불국사 가람도 안양문을 통해 극락전으로 향할 수 있게 배치되었다. 안양문 역시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26년(인조 4)과 1737년(영조 13)에 중창하였다. 석단 위에 세워진 극락전도 불타 버린 것을 1750년에 오환(悟還)과 무숙(武淑) 등이 재건하였고, 1925년 3월에 다시 중수하였다. 아미타불의 주처인 서방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주조된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이 안치되어 있다.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로전은 현재 관음전 서쪽 아래에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60년(현종 1)에 재건하였고, 조선 말기에 무너져 터만 남은 것을 1973년에 복원하였다. 이후 극락전에 안치되어 있던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을 옮겨 안치하였다.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무설전 뒤에 있는 관음전은 1470년(성종 1)에 중수하였지만, 1593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렸다. 이후 1604년(선조 37)에 해청(海淸)이 재건하였고, 1694년(숙종 20)과 1718년(숙종 44)에 다시 중창하였다. 원래 922년에 경명왕의 왕비가 전단목(栴檀木)으로 만든 관음상이 안치되었고, 1674년(현종 15)과 1701년(숙종 27), 1769년(영조 45) 세 차례에 걸쳐 금칠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없다.
석축과 다리, 난간, 기타 석조물은 창건 당시의 것으로, 부분 수리되었다. 석축 중간에는 자하문을 거쳐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 경주 불국사 청운교(靑雲橋) 및 백운교(白雲橋)’가 있고, 극락전으로 향하는 ‘ 경주 불국사 연화교(蓮華橋) 및 칠보교(七寶橋)’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는데, 모두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1905년에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돌아온 사리탑도 특이하다. 자하문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에 중건한 회랑과 경루 · 종루가 있었는데, 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 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에 복원하였다.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도 불리는 범영루(泛影樓)도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복원되었으며, 반대편의 경루는 조선 후기에 완전히 없어졌던 것을 1973년에 재건하였다.
『불국사고금창기』에서는, 김대성이 창건하였다는 몽성암(夢成庵)과 조선 후기에 세워진 심적암(沈寂庵) 등의 부속 암자가 불국사에 있었다고 한다. 청련암(靑蓮庵) · 백련암(白蓮庵) · 운창암(雲剙庵) 등의 이름도 전하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