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

불교
인물
삼국시대, 신라에 불법을 널리 알리려던 법흥왕을 위해 흥륜사 공사 강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순교한 법흥왕의 신하.
이칭
인명
거차돈(居次頓), 염촉(厭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527년(법흥왕 14)
주요 관직
사인(舍人)
내용 요약

이차돈(異次頓)은 신라 법흥왕 때 귀족들이 흥륜사 건립 공사를 강행하는 것에 항의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목숨을 바친 법흥왕의 측근 신하이다. 이차돈을 사형할 때 흰 피가 솟아나고 꽃비가 내리는 이적이 일어나 흥륜사 건립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9세기에 들어 이차돈을 추모하는 결사가 형성되었다.

정의
삼국시대, 신라에 불법을 널리 알리려던 법흥왕을 위해 흥륜사 공사 강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순교한 법흥왕의 신하.
가계 및 인적사항

이차돈(異次頓)은 거차돈(居次頓) 또는 염촉(猒髑)이라고 한다. 그의 성은 박 씨(朴氏)이다. 부친의 이름은 미상이지만 조부는 아진종(阿珍宗)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었다.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에는 이차돈의 부친은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법흥왕과 이차돈은 당숙과 조카 사이가 된다.

주요 활동

당시 고구려백제는 대륙으로부터 불교 문명을 받아들여 이미 국가로서의 체제를 공고히 다지고 있었다. 반면 신라는 아직 주1를 중심으로 한 부족 연맹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늘 불법을 일으켜 국가로서 신라의 지위를 공고히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신라 육부의 수장들은 전통 신앙만을 굳게 믿고 있었다. 법흥왕은 먼저 병부를 설치하고 주2을 반포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차돈의 주3로 이루어진 불교 공인은 법흥왕이 추구했던 개혁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이차돈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곧았으며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다. 그는 법흥왕의 주4으로 사인(舍人)의 직을 수행하였다. 이차돈은 왕의 개혁 정책과 불교를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신라 사회를 새롭게 도약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차돈은 불교를 공인하고자 하는 법흥왕을 돕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겠다고 제안하였으며, 이를 수락한 법흥왕은 이차돈에게 흥륜사 건립 공사를 강행한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하였다. 당시 주5가 이차돈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고 한다. 이어 하늘은 어두워지고 땅은 진동하였으며, 사방에서 꽃비가 내리는 등 여러 이적이 나타났다. 결국 이차돈은 22세 혹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불교를 공인하기 위해 자신의 육신을 희생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에서는 불교가 공인되었으며, 천경림(天鏡林)에는 흥륜사라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 건립되었다.

상훈과 추모

남간사(南澗寺)의 승려 일념(一念)이 지은 「촉향분례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에는 법흥왕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찰 창건을 강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법흥왕이 무기와 형을 집행하는 도구들을 늘어놓고 위엄을 갖춘 다음, 신하들을 불러 ‘자신이 명한 사찰의 창건을 누가 지체시키는가’라며 추궁하였다. 신하들이 두려워하며 왕명을 거역한 일이 없다고 할 때, 왕은 사인 이차돈을 불러 꾸짖고 그의 처형을 명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신라의 불교 공인과 관련해 이차돈뿐만 아니라 법흥왕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향전(鄕傳)』에서는 당시 상황을 조금 다르게 전하고 있다. 염촉, 즉 이차돈이 왕명이니 절을 지으라고 사람들을 속이자 신하들이 왕에게 이를 간하였고, 화가 난 왕이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냈다며 이차돈을 처형하였다는 것이다. 즉 「촉향분례불결사문」은 이차돈과 함께 법흥왕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데 비해 『향전』은 법흥왕을 소극적으로 묘사하며 이차돈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해마다 그의 기일에 맞추어 많은 사람들이 흥륜사(興輪寺)에 모여 그를 추모하였다고 한다. 흥륜사 금당에는 신라 주6의 소상(塑像) 중 이차돈의 소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차돈을 위해 자추사(刺楸寺)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차돈 순교비는 경주의 백률사(栢栗寺)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근에 영흥사터에 복원한 경주 흥륜사 금당에는 이차돈을 포함한 신라 십성의 주7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영흥사터 뜰에는 새로 조성한 6면의 주8 백률사 석당기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이능화, 『조선불교통사』(신문관, 1918)

단행본

논문

박광연, 「삼국유사에서의 염촉 순교 설화 수용에 대한 검토」(『역사문화연구』 55, 2015)
차광호, 「신라 하대 불교 정책의 변화와 사찰의 대응-이차돈 이야기 창작의 역사적 배경-」(『영남학』 72, 2020)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주석
주1

신라 때에, 씨족을 중심으로 나눈 경주의 여섯 행정 구역. 급량부, 사량부, 본피부, 점량부, 한지부(漢祇部), 습비부(習比部)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2

형률과 법령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법률의 총칭이다. 우리말샘

주3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 넓은 뜻으로는 주의나 사상을 위하여 죽는 경우에도 쓴다. 우리말샘

주4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 우리말샘

주5

감옥에서 죄수를 감시하던 구실아치. 우리말샘

주6

신라 때에, 이름난 열 사람의 승려. 아도, 이차돈, 혜숙(惠宿), 안함, 의상, 표훈, 원효, 혜공, 자장, 사파(蛇巴)를 이르며 이들 모두의 화상(畫像)이 경주 황룡사 금당(金堂)의 벽에 그려져 있었다 한다. 우리말샘

주7

제사나 장례를 지낼 때 위패 대신 쓰는, 사람의 얼굴을 그린 족자. 우리말샘

주8

다라니경을 새긴 석조물. 기단, 돌기둥, 옥개석으로 이루어지며, 돌기둥은 육각, 팔각으로 되는데 여기에 다라니경을 새겼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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